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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코멘터리

‘노회한 승냥이’로 평가받던 김영철의 방남이 남긴 것

“승냥이 같은 X이다.” “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는 얼굴이 편안하지 않고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책임 부담이 얼굴에 보이는 듯했다. 막무가내로 큰소리치고 억압적인 분위기로 만들어 얘기하려던 과거와는 달라 보인다.” 남북 군사회담 경험자인 예비역 장성 2인의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에 대한 평가다.

 

그는 1989년부터 남북 군사접촉과 대화에서 북측 대표를 해 왔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에 남측 대표가 말려들거나 머뭇거리면 속사포처럼 쏘아붙이며 대화의 주도권을 쥐려고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2007년 5월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김영철 북측 대표는 미리 준비해 온 조크를 남측 수석대표인 정승조 소장에게 던졌다. 한 고교생이 당시 미 대통령인 조지 W 부시가 자동차에 치일 뻔한 것을 구해주고 난 후 “당신이 부시 대통령인 줄 알았으면 구해주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가 알면 맞아 죽는다”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정 수석대표는 바로 “(북한처럼) 최고지도자를 상대로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나라도 있다는데 미국은 진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가 맞네요”라고 응수했다. 순간 김영철은 당황하면서 화제를 남북 간 안건으로 돌렸다.

 

앞서 2006년 5월 남북 장성급회담에서는 남측 수석대표인 한민구 소장이 김영철의 ‘순혈 논쟁’에 말려들었다. 한 수석대표가 “농촌 인구가 줄어들어 총각들이 몽골·베트남·필리핀·인도네시아 등에서 온 처녀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자 북측 김영철 단장은 “민족의 단일성이 사라지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한 수석대표가 “한강 물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리는 수준”이라고 하자, 김영철은 버럭 화를 내면서 “우리는 백의민족으로 하나의 혈통을 중시해 왔는데, 잉크 한 방울도 떨어뜨려서는 안된다”고 맞받아쳤다. 한 수석대표는 과거 동이족과 어울려 살던 말갈·여진·만주족 등까지 동원했지만 김영철은 “시간 낭비하지 말고 회담에 들어가자”고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의도적인 상대방 기죽이기였다. 이후 북한 노동신문은 “남조선의 친미사대매국세력이 운운하는 ‘다민족, 다인종 사회’론은 민족의 단일성을 부정하고 남조선을 이민족화, 잡탕화, 미국화하려는 용납 못할 민족말살론”이라고 비난했다.

 

김영철은 북한 김정일이 2009년 인민무력성 정찰국과 노동당 작전부, 35호실 등을 통합해 정찰총국을 만든 후 임명한 첫 수장이었다. 군 정보당국은 그가 2010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도발, 2015년 비무장지대(DMZ) 지뢰도발과 사이버 해킹 등의 총책임자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 만큼 북한 고위급 대표단 단장으로 2박3일간 방남했다 지난달 27일 귀환한 김영철 부위원장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석은 남남 갈등의 양상까지 빚어냈다. 비난하는 측은 주로 그의 평창 올림픽 폐회식 참석을 타깃으로 삼았다.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에 환대받아 참석하는 건 천안함 피격의 주범에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 남북 접촉에 방점을 두는 측은 북핵 해결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반박했다. 정부 관계자는 “김영철이 미국 동향, 우리 입장 등 얘기를 경청했으니 올라가서 보고하고 또 (김정은의) 반응이 있을 것”이라며 “김여정이나 김영남과는 큰 틀의 얘기만 하고, 디테일한 얘기를 할 수 없지만 김영철과는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예비역 고위 장성 ㄱ씨는 “대남전략 총책임자인 김영철과의 대화는 남북관계의 향배를 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며 “통전부장 김영철은 과거 김양건과 달리 무력도발도 기획 건의한 바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어 김정은의 여러 참모 중 남북관계 문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적장을 불러들여, 그 결과 북·미대화와 한반도 평화에 순기능으로 작용한다면 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북한의 숱한 숙청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김영철도 이번 남북 접촉 결과에 대한 부담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형편이다. 자칫 숙청의 빌미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핵·경제 병진정책 실패에 따른 자신의 권위 손상을 막기 위해 전형적인 책임전가 수법을 쓸 경우 김영철이 희생양이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 경우 김영철을 남한으로 불러들인 것이 그의 몰락을 부채질하게 되는 셈이다.

 

문제는 김영철의 방남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 태도였다. 정부는 “천안함 피격 주도자가 누군지 특정할 수 없다. 정부 입장에서 (공식 문건에) 공식적으로 김영철이나 정찰총국을 언급한 것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남북대화가 우선인 통일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평화 국면에서도 무력을 준비해야 하는 국방부의 태도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협상 전문가들은 강온 전략이 협상 테이블에선 유리하다고 입을 모은다. 남북관계에서 통일부가 북한을 어르고 달래더라도, 국방부는 “군은 김영철이 천안함 피격의 배후임을 잊지 않고 있지만 평창 올림픽의 성공적 마무리와 남북관계, 나아가 북·미관계 개선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김영철의 방남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보였어야 한다. 무력을 보유한 정부 부처의 경고 메시지를 보내 북측에 정치적 부담을 주는 실리를 챙기면서 남북대화의 명분도 살렸어야 한다는 의미다. 김대중 정부는 남북 합의에 따라 경의선 남측 육로 2㎞ 도로 공사를 실시했다. 당시 군은 적에게 침공로를 열어줬다는 보수층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정부의 남북대화를 뒷받침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군사적 목적에 따라서는 도로를 즉각 폐쇄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또 고정식 전차를 경의선 육로 부근에 은밀하게 배치, 혹시라도 있을 만일의 가능성에 대비했다.

 

정부는 대승적 견지에서 보수층까지 아우르는 국민의 협조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 남북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의 경우처럼 명분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이해를 얻는 데 소홀해 비판을 받았던 것은 반면교사였다. 김영철이 비핵화에 대한 우리 입장을 김정은에게 전달하는 효과가 커 세계적 축제에까지 초청한 것이라고 정부가 당당하게 설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