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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이야기

도끼 자루 썩는 지 몰랐던 군 취재 10년

 

 오늘은 <육군>지에 실린 원고를 옮겨봤습니다.

 

 

<미 항공모함 칼빈슨호에서>

 

 속담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기자란 직업을 선택한 후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 줄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다. 속담과 다른 것은 신선놀음처럼 우아한 데 빠져 세월을 잊은 게 아니라 사건을 정신없이 쫓다 보니 가정을 제대로 돌 볼 새도 없이 시간이 많이 흘렀다.

 

 상당 기간 동안 외교·안보 분야를 담당했던 기자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내 나이 먹은 것도 모르다가 군문에 들어선 친구들이 이제는 별을 달고 장군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다고 하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끼고 있다.
기자 생활 중 군 관련 기사를 가장 많이 써왔다는 것도 올해 초 김관진 국방장관의 집무실에서 감사패를 전달받고 알았다.

 

 감사패에 적힌 기간을 보니 2001년 초부터 2011년 말까지 군을 출입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 중간에 공백기도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청을 출입했고, 한때는 국회도 출입하다 다시 국방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공보장교들이 흔히 말하는 국방부 ‘재수생 기자’였다. 그러다가 올해 초부터는 신문사의 전국부장을 맡고 있다. 그러던 중 <육군>지의 원고 청탁을 받았다. 국방부를 출입하는 동안 겪었던 군, 특히 육군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소개해주면 좋겠다는 주문과 함께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고 보니 군 취재를 하면서 일반인이라면 가기 힘든 장소를 참으로 많이 돌아 다녔다. 판문점을 비롯한 최전방은 물론 웬만한 군부대는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는 것 같다. 백령도 군 부대는 물론 해군의 전략 무기인 잠수함 안으로도 들어가 봤다.
 
 한반도 유사시 유엔군의 후방기지인 일본의 군사기지 여러곳도 방문했다. 몇 달 전에는 미 정부의 초청으로 펜타곤(미 국방성)과 하와이의 미 태평양사령부를 다녀오기도 했다.

 

 

 많은 곳을 다니고 경험하다 보면 군 출입기자로서 에피소드가 많지 않을 수가 없다. 더 나아가 군 간부들과
특정한 이슈를 놓고 격론을 벌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나처럼 군 간부들과 논쟁을 많이 벌인 기자도 없었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기자이다 보니 특정 사안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그래도 군을 출입하는 동안 군을 사랑하는 마음이 뒤지지는 않았다고 자부하고 싶다. 얘기가 곁다리로 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과거 에피소드 한두 개만 소개하려고 한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기지에서 테러가 일어나 다산부대 소속 윤장호 하사가 희생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한적이 있다. 크나큰 비극이었지만 추가테러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윤 하사의 시신을 운구하는 작전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미 항모 탑재기 앞에서>

 

 그러던 중 기자 입장에서는 황당한 얘기를 듣게 됐다. 군이 윤 하사의 시신 운구작전에 관여한 간부들을 포상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작전을 잘 마무리했다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군의 계획은 유족은 물론 일반 국민들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참으로 군사적 차원만 고려한 결정이었다. 이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고 나니 역풍이 우려됐다. 군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지금은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근태 당시 합참 작전본부장을 찾아 갔다. 오랜 교분이 있었던 터라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는 김 본부장에게 정 포상을 하고 싶으면 아프간 테러사건의 파장이 가라앉고 시간이 흐른 뒤에 줘도 늦지 않다고 내 뜻을 전했다. 김 장군도 내 말뜻을 알아듣고 포상을 취소했다. 대신 관계자들은 나중에 포상을 받았다.

 

 

 기자가 기사를 쓰는 목적은 잘못된 사안을 고치거나 개선하는 것이지 누군가를 욕되게 하려는 게 아니다고 생각한다. 기사를 쓰지 않아도 소기의 목적이 이뤄졌다면 그것으로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잠수함 앞에서. 사진을 찍자 마자 일본 자위대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시치미를 딱 뗐다>

 

 이런 일도 있었다. 수년 전 6월, 회사에서 호국보훈의 달인 만큼 이와 관련한 기사를 주문했다. 마침 기자라면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는 제보를 받았던 터였다. 육군이 주력 사업으로‘ 무공훈장 찾아주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 훈장을 택배로 배달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제보를 받고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영예로운 훈장을 택배로 보낸다니….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6·25 참전용사인 시골 노인이 훈장을 택배로 배달받고는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당장 다음날 신문의 기사 제목이‘ 택배로 받은 훈장에 분노한 참전용사’가 될 판이었다.

 

 육군 관계자에게 “1년에 몇 건이나 택배로 훈장을 배달 하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그는 “그럴 리가 없다”고 펄쩍 뛰었지만 정작 육군본부에 확인하고 나서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관련 부서에서 인력부족을 이유로 상당한 기간 동안 택배로 훈장을 배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군 관계자는 “당장 잘못된 관행을 개선하기로 했다”면서 “앞으로는 근처 군부대에서 훈장 수여식 행사를 갖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기사화를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이라크 아르빌 자이툰 부대 성당 앞에서>

 

 부탁을 들어주자니 기자 입장에서는 사회면 톱기사를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군에 대한 이미지와 사기를 고려했다. 굳이 기사화하지 않더라도 나의 취재 덕분에 참전용사들이 군악대의 연주 속에 훈장을 가슴에 달면 족하다고 여겼다.

 

 이 밖에도 연초에 감사패를 전달받는 자리에서 육군 장병들이 군내 사이버지식정보방(PC방) 이용을 규정대로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김관진 국방장관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장관이‘ 전투형 부대’를 강조하다 보니 어떤 대대급 부대에서는 아예 사이버지식정보방의 문을 자물쇠로 잠궈 버린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장관은 일부 예하부대에서 자신의 전투력 강화 의도를 잘못 해석한 것 같다면서 당장 시정하도록 지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이 잘 이뤄졌는지 여부는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잠긴 문은 다시 열렸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찌하다 보니 군과 함께했던 일화가 자화자찬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몇 년 전 국방부를 같이 출입했던 동료기자 한 명이 <육군>지가 양복바지를 치켜 올린 배바지 차림의 40·50대 아저씨처럼 답답하고 완고한 느낌이라면, 다른 군의 월간지는 면바지나 청바지 차림의 날렵한 청년 이미지라고 빗댄 글을 읽었다. 웃음도 났지만 무릎을 칠 만큼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올해 발간되는 <육군>지를 보니 과거와 달리 많이 세련되어지고 읽을거리가 풍부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육군>지도 싸이의‘ 강남스타일’ 같은 파격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든다. 소위‘ 육군스타일’을 기대해 본다.

 

 하긴 군 출입기자 시절 까칠한‘ 야당’ 역할을 주로 했던 본인에게도 원고 청탁을 하는 것을 보니 <육군>지도 바뀌어 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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