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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이야기

'청와대 감귤’과 북한 인민무력부장

귤 200t은 28억원 어치, 송이버섯 2t 가격과 비슷···송이버섯 1㎏‘14만원’, 귤 10㎏ ‘1만4000원’

 

청와대는 11일 북한 측에 제주산 귤 200t을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귤은 10㎏ 상자 2만개에 담아 이날과 12일 이틀에 걸쳐 공군 수송기(C-130) 4대가 하루에 두 번씩 모두 네 차례로 나눠 운반된다고 하니 꽤 많은 양이다.

 

11일 제주공항에서 장병들이 북한으로 보낼 제주산 감귤을 공군 C-130 수송기에 적재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남측이 북측에 보낸 귤 200t은 대략 시중 가격으로 28억원 어치 쯤 되는 걸로 추정된다. 이로 미뤄 청와대가 북측이 보냈던 송이버섯 2t을 남측 시장가격으로 환산해 얼추 비슷하게 가격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이마트에서 송이버섯 1㎏의 가격은 14만원 정도이고, 귤 10㎏은 1만4000원 정도에 팔린다.

 

사실 남북간 만남에서 귤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9월 제주도에서는 남북 첫 국방장관회담이 열렸다. 당시 조성태 국방장관과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 회담 파트너였다.

 

조 장관과 김 부장은 제주공항에서 첫 상견례를 갖고 숙소 겸 회담장인 제주 서귀포 중문단지 내 호텔 롯데까지 같은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대화를 나눴다.

 

조 장관은 제주공항에서 5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를 일부러 제주도 해안도로를 돌며 가도록 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김일철 인민무력부장과 더 여유있는 대화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남북 군 수뇌부는 75분간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각 언론매체는 이를 ‘파격적인 승용차 밀담’이라고 보도했다.

 

두 군 수뇌는 시드니올림픽 남북한 공동입장을 화제삼아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사람은 서로 살아가는 얘기와 제주도 풍광을 화제에 올렸다.

 

북측 김 부장은 승용차 안에서도 제주도의 감귤 농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나중에 조 전 장관은 “아마도 이북에서는 보기 힘든 감귤이 지천으로 깔린 모습이 눈에 크게 들어와서 그랬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조 장관은 김 부장의 표정을 읽고 “요즘 남한에서는 귤이 ‘쓰레기’가 됐다”며 “우리 군에서는 감귤 쓰레기까지 처리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김 부장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강한 호기심을 보이며 반문했다.

 

이에 조 장관은 “제주지사가 귤을 공짜로 줄테니 군에서 제발 가져가서 처리해 달라고 했다”고 답했다. 2000년에는 제주도에서 귤이 예상 외로 큰 풍년이 들어 귤 가격이 폭락했을 때였다. 농장주들은 육지까지 운반하는 운송비도 안나온다는 이유로 귤을 현지에서 폐기처분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제주도 차원에서 군에 감귤을 구매해달라고 ‘SOS’를 쳤다.

 

조 장관은 “해군 LST까지 동원해 귤을 육지로 실어 나르고 있다”며 “그렇게 해서 전군에 귤을 배급하고 있는 데 우리 군이 귤 처리까지 떠맡아 하고 있는 셈”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김 부장은 상당히 놀란 듯 했으나 이를 애써 내색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표정에서 일종의 ‘속상함’으로 보일 수 있는 표정이 읽혀졌다는 게 조 전 장관의 후일담이다. 당시 조 장관은 남쪽의 풍족함을 은근히 자랑한 셈이었다.

 

김일철 북한 전 인민무력부장은 현직에서 물러나 수년 전부터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가 만약 남측이 보낸 귤을 받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진다. 혹시라도 그가 당시 기억으로 남측이 감귤이 남아 돌아 보낸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요새 귤은 그때처럼 가격이 폭락한 과일이 아니다. 그가 18년 전 제주도 감귤밭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궁금하다.

 

마침 맛 칼럼리스트 황교익 씨는 제주산 귤을 북측에 보낸 것과 관련해 “정치적인 타이밍이 아니라 맛의 타이밍이 참 좋다”고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밝힌 터다. 황씨는 “유통과정 없이 곧장 보내는 것이니 귤밭에서 바로 따먹을 때의 맛이 날 것이다. 간혹 귤 옆에 작은 잎사귀가 하나씩 달려 있기도 할 것인데, 그 푸른 잎사귀를 보며 남녘 먼먼 섬의 따뜻한 겨울을 떠올릴 것”이라고 적었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