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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코멘터리

전사자 유해 발굴의 정치학

언제부턴가 한반도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유해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6·25 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과 과거청산의 일환으로 진행된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 발굴이 대표적이다. 두 작업은 발굴 대상이 비정상적이고 비참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물론 차이점은 있다. 전사자 유해 발굴은 강한 국가보훈적 성격을 띠고 있다. 반면 민간인 피학살자 유해 발굴은 부당한 ‘국가 권력’의 폭력성과 과오에 대한 반성을 통해 과거청산의 계기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피학살자 유해 발굴작업을 재개하기도 했다.

 

전사자이든, 피학살자이든 발굴해 재매장한다는 것은 죽은 자의 유해를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만 해도 전사자는 대체적으로 숨진 곳에 묻혔다. 전사자 본국에 ‘무명용사의 묘’가 많았던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여기에 변화를 일으킨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을 치른 후 전사자 유해를 본토로 송환하는 사업을 중점 추진했다.

 

미국은 1973년 실종자와 전사자를 찾는 전문 기관인 ‘전쟁포로·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JPAC)’를 설립했다. 이들의 모토는 ‘우리는 절대로 당신을 전장에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느 경우든 반드시 당신을 집으로 다시 데려온다’였다. 전쟁 실종자나 전사자는 반드시 가족에게 인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국은 2016년 1월 JPAC에 미공군 생명과학연구소 등 2개 기관을 더해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으로 확대했다. DPAA에는 유럽·지중해 작전 파트와 아시아·태평양 파트까지 있다. 이들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은 물론 제1·2차 세계대전 당시 실종자와 미수습 전사자까지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국방부도 JPAC를 벤치마킹해 2007년 1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창설했다.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유해발굴감식단 휘호석에 새겨진 문구다.

 

DPAA는 한국군 유해발굴감식단과 유해공동발굴 작업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미군 전사자 유해 55구 송환을 계기로 북한에서의 미군 전사자 유해 발굴작업 재개를 북측과 협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한에서 이송된 미군 6·25 전쟁 전사자 유해 55구에 대한 송환 행사가 지난 1일 미 오산공군기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첫 미군 유해 송환은 1990년 5월 28일 이뤄졌다. 이날 판문점에서는 북한이 유엔사 군사정전위를 통해 한국전쟁 중 실종, 사망한 미군 유해 5구를 주한유엔군사령부에 인계하는 행사가 열렸다.

 

북한이 건넨 유해함은 길이 2m, 폭 40㎝, 높이 30㎝ 잣나무관이었다. 유골은 몸형태 부위별로 수습돼 흰솜과 종이로 쌓여 있었다. 소위 ‘K208’ 유해들이었다.

 

이후 북한이 발굴해 판문점에서 전달하는 유해 송환 행사는 33차례 더 이어졌다. 그 사이에 ‘인도주의적 차원’이란 이름하에 미군 유해 송환작업이 진행되면서 미군 유해를 인수하는 주체는 ‘유엔군사령부’에서 ‘주한미군’으로 바뀌어 갔다. 과거 주한미군을 인수주체로 표기한 언론에 대해 꼬박꼬박 ‘잘못’을 지적하면서 유엔군사령부로 표기해달라던 유엔군사령부측 요청도 나중에는 사라졌다.

 

미군유해 인수주체는 정전협정 체제에 대한 남북한 간의 상이한 견해, 남북한과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할 때 나름 심각한 사안이었다. 한국과 미국은 정전협정이 유효하기 때문에 판문점에서 이뤄지는 미군 유해 송환의 주체는 유엔군사령부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북측은 96년 4월에 정전협정 무효를 일방적으로 선언한 이후부터는 유엔군사령부 존재를 부정했다. 그러면서 유엔군사령부가 아닌 미군 대표가 판문점에 나와 미군유해를 인수해 가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핵심은 북한이 미군 유해 인도를 미국과의 직접 통로 창구로 활용하려는 데 있었다.

 

북한의 의도는 관철됐다. ‘유엔군 유해 송환’이란 말은 ‘미군 유해 송환’으로 바뀌었고, 유엔군이 아닌 미군이 유해를 인수했다는 보도로 바뀌었다.

 

이처럼 북한의 유해 발굴과 송환은 철저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뤄졌다. 지금도 북한은 미군 유해 발굴과 송환 문제를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활용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음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북한이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도 북한 외교처럼 ‘살라미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찔끔찔금 미군 유해를 전달하면서 종전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연결 고리로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단계적으로 유해를 보내는 북측의 협상 태도에 미국은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은 북한에 베트남을 벤치마킹하라고 공공연하게 권하고 있다. 미국과 베트남이 성공적인 정치·경제·안보 관계를 이룰 수 있는 토태를 마련해준 것은 미군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베트남 당국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이 문제가 큰 역할을 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베트남은 1988년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을 계기로 미국과 관계가 발전해 1995년 양국간 공식 수교로 이어졌다.

 

남북 정상은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비무장지대(DMZ)의 실질적인 평화지대화를 합의했다. ‘6·25 전사자 유해 공동발굴’은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등장했다. 사실 ‘비무장지대(DMZ) 유해발굴’은 2007년 11월 국방장관회담 때 남북 간 합의사항이었다. 경색된 남북관계로 오랫동안 서류철 깊은 곳에 묻혀 있다가 11년만에 다시 끄집어져 나온 것이다.

 

이렇듯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끝까지 찾아 책임지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로 자리매김했지만, 여러가지 다른 성격의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무장 지대의 전사자 유해 발굴은 남북한군 뿐만 아니라 미군 및 다른 유엔군 참전용사들, 심지어 중국군 유해 발굴까지 겸하는 작업이다. 남북간 평화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세계 여러나라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래저래 유해 발굴은 단순히 죽은 자를 다시 찾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