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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코멘터리

‘국군의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육군이 앞장서라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대한민국 군부는 창군 주역 중 많은 인사들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라는 점에서, 나중에는 군사반란(쿠데타) 전력이 있다는 점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얘기가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왔다. 그러나 해군 장교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결이 다르다. 이들은 독립군 후예라는 자부심을 은근히 과시하곤 한다.

 

해군은 지난달 8·15 광복절에 맞춰 214급 잠수함(1800t급) 9번함 함명을 ‘신돌석함’으로 짓는 행사를 가졌다. 신돌석 장군은 대한제국 당시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무장 항일운동을 펼쳤다. 해군 잠수함의 함명에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많다. 214급 1번함 ‘손원일함’은 손정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의 장남이자 해군 창설자인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이름이다. 2번 정지함은 왜구를 토벌했던 정지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 3번 안중근함, 4번 김좌진함, 5번 윤봉길함, 6번 유관순함, 7번 홍범도함, 8번 이범석함 등은 모두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의 이름을 땄다.

 

육군으로 가보자. 창군 초기 육군 주역들 상당수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로,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 군국주의와 맥이 닿는다. 그 유산이 최근 날조된 것으로 확인된 6·25 전쟁영웅 ‘육탄 5용사’와 ‘육탄 10용사’다. 군의 가짜 영웅 대부분은 일본 군국주의를 모방한 과거 친일파 출신 군부의 작품이다. 일본 군국주의 선동의 도구를 빌려와 호국 영웅의 아이콘으로 포장했던 것이다.

 

공군은 떳떳하게 창군 주역들의 식민지 시대를 밝히고 있다. 공군 창설 멤버 상당수는 일본군 출신들이다. 해방 후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이근석 대령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의 가미타니 소년항공학교 출신으로 중국 공군기 18기와 영·미 공군기 5기 등 총 23기를 격추한 일본군 에이스였다. 6·25전쟁 초기 시흥 상공에서 전사한 후 공군 최초로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을 추서받았다.

 

원산지구 폭격에서 전사한 신철수 대위, 진남포 상공에서 전사한 나창준 대위, 간성지구에서 숨진 박두원 중위 등은 일본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출신이다. 옥만호 12대 공군참모총장도 일본 육군비행학교 출신이다. 그는 6·25전쟁 당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에 참가했고, 100회 출격을 기록했다.

 

전쟁 기간 중 사망한 총 22명의 조종사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군 출신이었다. 전쟁 후 장군으로 승승장구한 이들도 식민지 시대의 행적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사실이라는 것이다. 공군 후배들도 있는 그대로의 공과를 드러내는 그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육군이 전쟁영웅으로 추앙하는 한 예비역 대장은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을 상대로 한 자신의 행각을 부인해 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창군 육군 원로들도 비슷했다.

 

국군 창군 당시 수뇌부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장악하면서 광복군의 맥을 잇지 못한 한계로 군 역사가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틀어졌다는 지적이 작금에 나오고 있다. 광복군 출신인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은 7개월 만에 해임됐고,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은 착근에 성공했다. 그러다보니 일본 육사 56기생으로 국군 군번 1인 이형근 예비역 대장은 “광복군은 망명군으로서 정식 군대로 보기 힘들다”고 폄하했다.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군에서 득세했다.

 

이제 끊어진 광복군 정신을 잇기 위해서라도 ‘국군의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하자는 의견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상징적으로나마 친일 군부를 청산하고 군의 뿌리를 광복군으로 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때라는 것이다. 앞서 16·17대 국회 때 ‘국군의날 기념일 변경 촉구 결의안’이 발의됐으나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현행 국군의 생일은 1956년 9월21일 대통령령 1173호에 의해 제정된 10월1일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과거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군의날은 창군 이후 각 군별로 창설기념일을 제정하여 시행해 오던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정해졌다. 그런 면에서 1950년 6·25전쟁 당시 육군 제3사단 23연대가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해 정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한 셈이다. 38선 돌파일은 일본군 출신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은폐하려고 동족상잔의 아픔이 담겨 있는 6·25전쟁에 마치 국군의 정통성이 있는 양 호도한 측면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장병들 역시 우리 국군이 항일 독립전쟁의 역사와는 무관한 것처럼 여긴다.

 

국군의 생일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국군의날이 광복군 창설일로 바뀌면 친일 군부 인사들의 일제강점기 행적은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까지는 6·25전쟁 이후 행적만 밝히면 됐다. 일각에서는 국군의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변경하자는 것은 좌파들의 주장이라는 이념적 논쟁까지 제기한다.

 

모든 기념일에는 상징성이라는 힘이 있다. 국군의날 역시 국가의 정체성과 미래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런 면에서 국방개혁 2.0을 통해 군이 환골탈태를 모색해야 하는 현 시점에서 국군의날 변경을 검토할 필요성이 커졌다. 창군 초기에도 그랬듯이 핵심은 육군이다. 육군이 앞장서면 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이는 결자해지 측면도 있다. 분위기도 바뀌었다. 현역 장군들은 일본군 출신들과 다른 세대일뿐더러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은 세대도 아니다. 오히려 현역들은 국군의 정신적 뿌리를 제대로 찾을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예비역 선배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서슴없이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광복군 역사를 국군 역사로 편입시키는 문제를 검토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동안 광복군 역사를 군부가 애써 외면해 왔다는 것에 대한 간접적인 질책으로도 들린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