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의 기수’를 아시나요. 요즘 세대들에게 ‘배달의 기수’란 택배나 오토바이 음식 배달하는 이들 정도로 받아들여지겠지만, 1970~1980년대의 ‘배달의 기수’란 국방홍보영화였다. 지금은 지상파에서 사라진 KBS의 TV프로그램으로 ‘남북 대치상황에서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다’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다 ‘배달의 기수’ 프로그램은 방송사의 노조결성을 계기로 편성표에서 사라진다. 추억의 ‘배달의 기수’를 다시 보고 싶으면 국방홍보원 홈페이지로 가보면 된다.
군이 처음으로 공개한 천무 K-MLRS-2 발사 장면. 육군은 지난 2월 3일 230㎜급 다연장 천무의 실사격을 실시했다.
그 ‘배달의 기수’가 최근에 다시 부활한 느낌이다. TV 뉴스 시간만 되면 육군 전차 행렬, 해군 구축함의 함포 발포, 공군 수송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특수부대원들의 낙하 모습 등이 번갈아가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화면을 꽉 채운다. 여기에 미군의 패트리엇 미사일과 고고도방어체계인 사드(THAAD)의 발사 장면, 미 항모의 거대한 위용도 거든다. 이제 다음달부터 한·미연합훈련인 키 리졸브·독수리훈련이 시작되면 더욱 자극적인 화면이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과거 배달의 기수와는 달리 컬러 화면이어서 훨씬 실감난다.
2016년의 배달의 기수
1970~80년대 배달의 기수
도하 언론에서는 각종 훈련모습을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보도하면서 ‘사상 최대 규모’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그런데 진짜로 ‘사상 최대’일까. 솔직히 그것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군에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왜일까. 군은 필요에 따라서 훈련모습을 공개하기 때문이다. 소위 군이 보도자료 릴리스를 ‘로 키’로 하느냐, ‘하이 키’로 하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여지는 편차는 크게 마련이다. 남북관계가 좋으면 청와대는 국방부에 ‘로 키’ 보도를 지시하고, 국방부는 합참과 육·해·공군 각군에 보도자료를 제한해서 언론에 제공할 것을 하달한다. 어떤 경우에는 훈련 참가 규모도 정확히 밝히는 것을 꺼린다.
최근 언론보도를 보면 악화된 남북관계를 반영한 ‘하이 키’가 분명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육·해·공군과 합참이 보도자료를 뿌려대기 바쁘다. ‘사상 첫 공개’라는 이례적인 사례도 부쩍 늘었다. 마구 쏟아지는 국방관련 뉴스를 보면 마치 전쟁이 임박한 게 아니냐는 느낌이 들 정도다. 솔직히 정부가 그런 위기위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방관련 뉴스가 폭증하면서 신문과 방송 매체들도 바빠졌다. 요즘에는 인터넷 매체까지 가세하다 보니 ‘똑같은 제목, 똑같은 내용’의 뉴스가 포털 사이트에 ‘줄줄이 사탕’이다.
박근혜 정부판 ‘배달의 기수’ 제작에 군과 언론 매체는 매우 협조적이다. 군이 이례적으로 훈련 장면을 공개하는 사례는 과거보다는 많아졌다. 언론의 접근이 힘들거나 보안이 필요한 훈련에 대해서는 군이 자체적으로 촬영한 자료를 친절하게 서비스하고 있다. 언론도 이에 화답하듯 한꺼번에 쏟아지는 훈련 모습을 그때그때 즉시적으로 보도하기 보다는 날짜별로 나누어서 골고루 안배해 TV 화면이나 신문지상에 싣고 있다.
한편 군의 작전 공개에는 ‘정보 왜곡’의 개연성도 숨어 있다. 특히 TV 화면이 그렇다. 전문가들은 TV에서 본 장면은 아무리 현실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단계 건너서 보는 ‘2차 세계’이지, 결코 ‘1차 세계’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아프간전 당시 미군은 CNN 등의 TV 뉴스를 통해 미 육군 레인저스(Rangers)가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남서쪽 95㎞ 지점의 공군기지로 낙하산을 이용, 침투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공개했다. TV 화면에는 낟알 크기의 초록점으로 빛나는 특공대원들과 파도처럼 움직이는 낙하산들이 가득했다.
미국 시청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이 낙하산 침투는 TV 방송용 연출작전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미 육군 패스파인더(Pathfinder) 팀이 레인저스에 앞서 미리 탈레반의 공군기지에 침투해 탈레반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레인저스 대원들을 투입시키면서 야간 투시장비를 이용해 낙하장면을 촬영했던 것이다.
미군은 영상미디어로 가슴 뭉클한 공중 강습 장면을 중계해서 미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국내에서도 소위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한 연출은 자주 있는 편이다.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은 지난 1월18일 남한강에서 혹한기 도하훈련 장면을 언론에 공개했다.
신문 사진기자들과 TV 촬영기자들은 이날 훈련 시작이 예정된 시각에 나타나기로 한 K-2흑표전차와 K1A1전차, K-21보병전투차량 등 200여대를 기다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날따라 눈이 많이 내려 전차는 방한구(전차 체인)를 장착해야 했다. 전차들은 방한구를 한 만큼 도로 보호를 위해 포장도로를 피해 멀리 우회해야했다. 그 바람에 도착시간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간이 촉박한 TV 촬영기자들은 ‘저항군’으로 대기하고 있던 K2전차 5대와 K21보병전투차량 10대, 코브라(AH-1S) 공격헬기 2대만으로 훈련장면을 담아야 했다. 그날 저항군 궤도장비들은 ‘좋은 그림’ 제공을 위해 공격부대의 주력 궤도장비인 것처럼 도섭(徒涉, Fording·수심이 얕은 하천을 별도의 도하장비 및 보조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건너가는 것)을 3차례나 연출해야 했다.
당초에는 공격부대의 K-2전차, K1A1전차, K-21보병전투차량 등 30여 대의 궤도장비가 연막탄 사이로 강물을 도섭하기로 했던 장면이었다. 그날 뉴스는 ”우리 육군의 최신예 전차인 K-2 흑표전차가 굉음을 내며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더니 물살을 가르며 도하를 시작합니다. K2 흑표전차뿐 아니라 K1A1 전차와 K-21 보병전투차량 등 30여대가 도하장비도 없이 약 250m 폭의 강을 건넙니다“로 시작했다.
TV 화면이나 신문 사진을 위한 훈련 연출은 공지합동훈련에서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굉음을 울리는 수십대의 전차 행렬과 이를 따르는 대규모 지상군, 또 그 위를 나는 공격헬기가 동시에 나타나는 모습은 장관이다.
그러나 퍼레이드가 아니라면 실제 전장에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작전에 투입되는 전차가 우루루 떼로 몰려다니고 공격헬기가 바로 그 위를 나는 경우는 영화 장면에 가깝다. 특히 전차를 후방에서 지원하는 공격헬기는 육안으로 관찰하기 힘들 정도로 떨어진 상공에서 비행하고 있어야 정상이다.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합참의장 시절 이런 연출된 모습에 극도로 알러지 반응을 보였다. 장면이 밋밋해도 훈련 모습 그대로를 찍으라는 것이었다. 또 군 작전훈련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도 별로 탐탐치 않게 여기는 편이었다. 이 때문에 참모들이 의장을 설득하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그랬던 김 실장이 작금에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군 뉴스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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