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사망한 베트남 독립 영웅 보 구엔 지압(武元甲) 장군은 ‘20세기 최고의 명장’으로 불릴만 하다. 미국 타임지는 그를 ‘붉은 나폴레옹’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이제 그는 전설로 남게 됐다.

 

 지압 장군은 1950년대 프랑스와의 항불(抗佛) 전쟁, 그리고 1960~70년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고, 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3불 전략’으로 유명하다. 손자병법을 원용한 것 같은 이 병법은 현대 경영학에서도 자주 인용될 정도다.

 

 실제로 남베트남 전투의 80%는 미군이나 월맹군이 아닌 베크공이 선택해 벌어진 전투였다는 사실이 미 국방부의 분석 결과 밝혀졌다. 또 월맹군은 미군과 근접전을 펼쳤다. 그것은 미군이 공습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설날 명절에 이뤄진 구정 대공세 역시 적의 허를 찌르는 기습이었다. 구정 대공세로 미 베트남 대사관은 벽에 구멍이 뚫리는 수모를 맛봤다.

 

 닉슨 미 대통령이 미 합참의장으로부터 “베트공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겠다”는 확답까지 챙겨 받았던 케산 미 해병대 기지 공격 역시 성동격서 전략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캄보디아 국경에서 시작해 10년간 지그재그로 뚫어 120㎞로 달했던 베트공 땅굴도 그의 지휘아래 만들어졌다. 이 땅굴은 지하 3~4층으로 이뤄져 미군이 찾아내 공격하는데 애를 먹었다. 미군은 당시 채구가 작은 편인 ‘굴쥐’로 불린 병사(주로 아일랜드 출신)가 45구경 권총과 손전등을 들고 땅굴로 들어가야 했다.

 

 지압 장군은 전쟁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결국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뤄진다는 사실도 간파했다. 그는 생전에 “전투는 전략이라는 큰 목표를 이루는 수단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지압 장군에게 중요 전투지역은 베트남이 아니라 미국 본토였다. 그는 여론전을 알았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반전 여론에 굴복해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를 “우리는 프랑스군과 미군을 정확히 파악했지만, 그들은 베트남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 들지 않았다. 우월한 무기만으로 충분히 이길 것으로 오판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무리 첨단 무기로 무장했더라도 우수한 두뇌가 없으면 다 헛일”이라고도 했다.
 



 지압 장군이 서방세계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첫번째 계기는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지배를 끝내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식민지 피지배 세력이 게릴라전에서 시작해 정규군으로 무장, 유럽 제국주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월맹군은 3개월에 걸친 치밀한 준비로 압도적인 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군을 55일 만에 퇴각시켰다. 전투가 시작되자 월맹군은 밀림 속에 숨겨뒀던 105mm 곡사포를 발사해 프랑스군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그는 1979년 2월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땐 10만 명의 지역 예비군으로 약 20만 명의 중국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지압 장군은 쇼팽을 좋아하고 프랑스 역사에 심취했던 사학도였다. 알렉산더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명장들의 병법에 통달했다. 역사 교사와 신문기자를 지낸 그가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39년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인 호치민(胡志明·1890~1969)을 중국에서 만나면서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압 장군의 탁월한 지략과 함께 베트남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은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의 마음가짐, 즉 정신상태였다. 북베트남군의 팔에는 ‘북에서 태어나 남에서 죽는다’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베트남에 도착하는 날부터 본국으로 돌아갈 날짜만 계산했다.

Posted by 경향 박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