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가 단독보도라면서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내놓았네요. 한국 정부가 62년 전에 이어도 관할권 가질 기회를 스스로 철회했다는 내용인데요.
한국일보는 1951년 美외교문서를 바탕으로 한국 정부가 62년 전 미국에 이어도의 관할권을 요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 외교관이 미국 측에 이어도가 울릉도 근처에 있다고 잘못 설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 외교문서 ‘1951년 아시아태평양편’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7월 19일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는 존 덜레스 국무부 대일강화조약 특사를 방문, 일제 점령 영토의 반환 문제를 다룬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최종안과 관련한 한국 입장을 담은 서신을 전달합니다.
한국 정부는 이 서신에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와 파랑도(이어도)의 반환을 명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덜레스 특사가 독도와 이어도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양 대사와 한표욱 외교관은 “일본해에 있으며 울릉도 부근에 위치한 것으로 안다”고 잘못 말했다고 합니다.
이후 미국 외교문서는 한국이 이후 이어도 반환 요구를 거둬들였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국무부는 “한국 대사관이 (추가 확인에서도) 독도와 이어도의 위치를 모른다고 했다”며 한국의 요구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의견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딘 러스크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는 1951년 8월 9일 덜레스 특사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한 ‘러스크 서한’에 “이어도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으로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해야 하는 섬에 포함돼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요구는 철회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적었다는 겁니다.
러스크 서한은 또 독도에 대해 “한국이 영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고 1905년쯤부터 일본 관할 아래 놓여 있다”며 한국 영토로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는 결국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로 주장하고 이어도를 자국 방공식별구역에 포함시키는 한 단서가 됐다는 게 한국일보의 보도 내용입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백두산 정계비가 생각났습니다.
백두산 정계비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경계를 정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백두산 정계비’는 조선 숙종
38년인 1712년 백두산 정상 동남쪽 4km 지점에 설치됐으나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사라지고 없습니다. 대신 지금은 정계비의 탁본만 남아 있습니다.
탁본에 남은 정계비의 내용에 따르면 조선과 청나라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양국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당시 국경 조사에서는 청나라 파견관 대표인 오자총관 목극동의 뜻대로 글자가 들어갔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조선도 국경 조사에 관리들을 파견했으나 당시 조선 측 대표였던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가 노쇠함을 이유로 백두산 정상 등정을 포기하는 바람에 조선에서는 이의복 등 군관과 역관 6인만 정계비에 글을 새기는 데 참여했습니다.
결국 조선 파견단은 책임자가 없었던 탓에 청나라 목극동이 자신의 뜻대로 글자를 새기는 것을 수동적으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후 청나라는 토문을 두만강으로 해석하고 간도가 자신들의 영토임을 주장하게 됩니다. 급기야는 1909년 일본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이곳을 청에 넘겨 중국 영토로 간주하기에 이릅니다.
만약 조선의 박권과 이선부가 청의 대표단과 함께 백두산 정상에 끝까지 올라 조선이 원하는 정확한 지명을 비에 새겨 넣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역사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조선 고위 관료의 무책임한 행위가 아쉽기만 합니다.
국방부는 국방백서를 통해 독도에 대한 영유권 수호 의지를 강력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서는 “우리 군은 서북 5개 도서와 마라도·울릉도·독도 등을 포함하는 동·서·남해안의 우리 영토를 확고히 수호하기 위해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의지의 표현으로 독도 근해에서 실시한 ‘독도방어훈련’ 사진이나 아시아 최대 수송함 독도함의 훈련 모습까지 싣기도 합니다.
국방부 출입기자 시절 ‘영토 수호’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지역에서 긴장을 고조시키면 반드시 나오는 것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우리 영토인 NLL을 수호하겠다”는 결의에 찬 발언들입니다.
군이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국토를 지키는 것이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영토를 지키는 데 있어서 조금만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되면 그 후유증이 엄청나게 커지게 됩니
다. 이어도를 둘러싼 논란이나 ‘백두산 정계비(白頭山 定界碑)’의 탁본이 그 증거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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