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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이야기

쿠데타세력은 국립묘지 안장, 반대인사는?

 오늘은 국가보훈처의 '고무줄 잣대'를 소개하겠습니다.

 

 보훈처는 지난해 고(故)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을 국립묘지에 안장토록 결정해 놓고도, 2006년 숨진 고(故)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의 안장은 거부했습니다. 두사람 다 사면복권됐고, 이후 훈장은 강 전 사령관이 더 많이 받았습니다.

 

 국가보훈처 국립묘지안장대상심의위원회(위원장 정양성)는 지난 8일 강 전 사령관의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했습니다. 보훈처는 안장 거부 이유에 대해 “강 전 사령관이 1981년 해운항만청장으로 재직 시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며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 안장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심의 과정에서 유가족들이 “강 전 사령관이 1988년 사면복권됐다”며 관련 서류를 제출했지만 보훈처는 이를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보훈처의 이같은 처사는 지난해 8월 5공화국 인사들의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로 징역 2년6월에 추징금 5000만원을 선고받고 복역한 안 전 실장의 안장을 허가한 것과는 형평성이 어긋나는 것입니다. 

 당시 보훈처는 “안씨가 사면복권됐고,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내는 등 국가안보에 기여했다”고 안장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국립묘지안장심사위원들에게 부적절한 영향을 행사한 사실이 감사원 감사 결과 드러났습니다.

 

 강 전 사령관의 유족들은 줄기차게 고인의 국립묘지 안장 재심의를 요구해 왔습니다. 

 유족들은 “신군부 세력에 반대하다 수형 생활은 물론 순화 교육까지 받는 등 고초를 당한 고인은 국립묘지 안장을 못하게 하고, 신군부 세력의 핵심은 국립묘지 안장을 허가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게다가 강 전 사령관의 감옥살이의 배경으로는 해운항만청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 국민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신군부에 협력을 거부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어찌됐든, 제3자가 봐도 보훈처의 처사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보훈처는 신군부 독재정권에 참여했던 인사의 경우 보훈처장까지 부당하게 심사에 개입해 국립묘지에 안장시키고, 신군부에 반대했던 군 인사에 대해서는 국립묘지 안장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강 전 사령관 유족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후사정을 살펴봤습니다. 유족이 밝힌 경과는 이렇습니다. 

 

 강 전 사령관의 안장건에서 보훈처가 여러 실수한것이 드러났는데도 계속 책임회피를 하기에 유족들은 국민권익위에 제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국민권익위(김영란 위원장)에서는 보훈처의 잘못을 인정해 재심을 권고했습니다.

 

 그런데 안현태장군건에 대해선 보훈처가 심하게 통과시키는 쪽으로 몰고가 사회적 문제를 만들더니 강 전 사령관의 경우에는 보훈처의 실수때문에 국민권익위의 강권에 못이겨 재심하게 됐다고 처음부터 (안장을) 방해하는 쪽으로 몰더니 결국 부결시켰습니다.

 

 그동안 보훈처가 강 전 사령관의 안장을 거부한 이유로 사면복권이 안된 것을 얘기하다가, 유족이 사면복권 기록을 보이니 동명이인일 수있다는 헛소리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보훈처에 국가기록원에서 발행한 사면복권기록을 보여주니 당시 보훈선양국장이 “장군시절 받은 을지무공훈장(두번째 등급, 강창성수여)보다 위관시절 받은 화랑무공훈장(세번째 등급, 안현태 수여)이 더 가치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강창성 장군은 6.25 중 화랑무공훈장 2번이나 받았습니다.

 

 이제 이의제기, 상급기관 행정심판, 행정소송 등으로 문제를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유가족 진술서


 존경하는 국립묘지 안장대상 심의위원회 위원님들,

 

 고(故) 강창성 장군은 2006년 2월 14일 9시 반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은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하자마자 6.25가 발발, 3년간 소,중,대대장으로 참전했고, 보병연대장을 거쳐 동기 중 최초로 육군준장으로 진급과 함께 초대 중앙정보학교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보병 5사단장 및 보안사령관등을 역임하고 3관구사령관을 끝으로 전역했습니다. 군에서 을지무공훈장등 10여개의 훈장을 수훈하였으며, 저서 <한국/일본 군벌정치사>는 한국과 일본의 군맥과 사조직 연구의 고전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리고 1976년 3월부터 1980년 2월 까지 4년간 현 해양수산부의 전신인 해운항만청의 초대 청장으로 재임하며 우리나라 해운산업 발전과 현 해양수산부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그러나 1980년 7월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2년 반에 걸친 수형생활을 했습니다. 고인은 “어차피 보복 받는 것 3심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하며 대법원 항소를 포기하고 3년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혹독한 정치보복이었다는 것은 여러 역사서와 언론에 자세히 그리고 수없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투옥기간 중 혹독한 ‘순화교육’이라는 청와대 특별지시에 의한 ‘정치보복’을 받아 체중 80kg(키 175cm)의 체격이 57kg으로 왜소화됐습니다. 

 “강씨에게 순화교육을 시키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보고하라고 청와대에서 지시했다”고 당시 교도관들이 증언한 언론보도들이 나갔습니다. 고인은 1982년 말 2년 5개월의 수형을 마치고 가석방됐습니다.

 

 고인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고, 이후 16대에 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해서 생긴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두 당에서 부총재와 총재권한대행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고인은 고령에도 정력적인 의정활동으로 최우수 의정활동의원으로 여러 번 선정됐습니다.

 

 사망 시 고인은 본인이 당연히 국립묘지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고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안장 거부가 됐고, 시간이 지난 지금 고 안현태 장군님의 안장과 더불어 야기된 언론과 국회의 이의제기에 결부해, 유가족들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당시의 고 강창성 장군의 안장거부가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이런 유가족의 민원에 대해 국민권익위원회는 재심 권고를 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고인의 사면복권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정부기록보존의 미비 때문에 기록이 제대로 남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유가족들은 이런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됐고 사면복권사실을 알렸으나 정부기관이 그 기록을 찾지 못해 유가족이 직접 나서서 당시 언론보도와 국가기록원의 기록(1988년 2월 27일)을 찾아냈습니다.

 

 또한 이 과정 중 알게 된 몇 가지 문제들과 더불어 고 김용대 장군님의 안장 경우도 알게 됐고, 형평성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2006년 1월 30일 국립묘지법이 처음 시행되었고, 2006년 2월 14일 돌아가신 강창성 전의원이 첫 번째 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의위원회가 구성조차 되지 않았고, 심의기준도 없었습니다.

 

 2006년 3월 14일 첫 심의가 열린 날, 심의위원들은 안장심의를 위해 급하게 기준을 만들었고 그것이 금고3년 이상 실형을 선고받은 자는 안장을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이후 몇 차례 심의기준이 변경되었고, 최근에는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 받은 자는 심의위원회에서 심의해 안장 여부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시 심의위원회는 금고 3년 이상을 안장심의 기준으로 정했지만 같은 해 6월, 그러니까 강 전의원보다 3개월 뒤인 2006년 6월 14일에 심의한 고 김용배 장군님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사면복권도 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안장이 결정되었습니다. 

 

 고 강창성장군의 유해는 언젠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생전의 자택에 임시 안치됐다가 지금은 현재 고인의 고향인 경기도 포천에 가매장된 상태입니다.

 

 고 강창성 장군은 생전에 ‘일중독’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의 책무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인과 행정가, 정치인으로서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고 평생을 국가에 충성했습니다.

 

 요번에 탄원서 서명을 받는 과정 중에 군의 최고원로 중 한분인 채명신 장군님(육사  5기,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은 “강창성 장군은 나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 중 하나다. 그런 사람이 국립묘지에 못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준엄히 말씀하셨고, 

 대한민국의 마지막 주월공사로서 교민들 탈출을 끝까지 지휘하다가 월맹군에 잡혀서 5년간 억류생활 끝에 대한민국에 다시 돌아온 이대용 장군님(육사7기, 현 육사총동창회 명예회장, 전 육사총동창회장)은 “세상에 강창성 장군이 국립묘지에 못 들어가면 누가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라고 격한 감정을 토로 하셨습니다. 

 두 분은 고 강창성 장군의 군 선배로서 6.25전쟁을 같이 치룬 전우들입니다.

 

 전직 3부 최고 수장인 김영삼 전 대통령, 남덕우 전 국무총리, 박관용 전 국회의장님. 박세환 현 재향군인회 회장, 이상희·이준 전 국방장관, 도일규 전 참모총장님 등 군 원로들. 원유철 현 국회국방위원장, 강동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전 해운항만청장·현 여수 엑스포 조직위원장,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 이인호 전 주 러시아 대사님 등 사회지도층 인사분들 여러분이 이런 의견에 동의해 주셔서 탄원서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서명을 해주셨습니다.     

 

 고 강창성 장군의 유족들은 고 안현태 장군님과 고 김용배 장군님의 국립묘지안장에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그 분들도 국가에 충성을 한 분들이고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충분한 분들입니다.

 

 위원님들!  6.25 전쟁 전 기간 동안을 포함하여 평생을 국가에 봉사한 고 강창성 장군도 국립묘지에 안장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고인은 대전이 사령부 본부였고 충남북을 관할했던 제3관구사령관 재직 시 제2국군묘지(현 대전 현충원)의 터를 잡았던 장본인으로 대전에 안장되길 바랐습니다. 저희 유가족은 고인이 평생 국가에 봉사한데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인 국립묘지 안장만 바랄 뿐입니다.
 
 심의위원회의 현명한 판단과 조치를 머리 숙여 앙망합니다.

 

고 강창성 장군 유족 일동.  2012. 5. 10.


 ■국민권익위 결정문 요지

 

“망인에 대한 국립묘지 안장 심의 시, 관련 법 적용 및 사면복권 사실 확인 등에 있어서 안장이 결정된 故 김용배 장군, 故 안현태 장군의 안장 심의 시와 형평성에 위배되니 망인에 대하여 국립묘지 안장 심의”해 달라는 건에 대해

 

“망인이 2006. 2. 14. 사망하자 2006. 3. 14.부터 같은 해 5. 28.까지 적용된 심의기준인 금고 3년 이상 제외규정에 따라 망인에 대한 안장을 거부한 반면, 

 故 김용배 장군은 2006. 3. 13. 사망하였음에도 망인에게 적용한 위 심의기준을 동일하게 적용하지 아니하고, 위 심의기준의 운영과정상 미비점을 개선, 보완하여 2006. 5. 29. 제정된 이 운영규정의 새로운 심의기준에 따라 2006. 6. 14. 뒤늦게 故 김용배 장군에 대한 안장을 결정하였는데, 

 이때 이 운영규정의 새로운 기준이란 망인에게 적용된 금고 3년 이상 제외규정이 삭제되고,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자는 심의결과에 따라 안장 여부를 결정’한다는 내용”이고

 

“故 김용배 장군, 故 안현태 장군의 경우, 국립묘지의 영예성 훼손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이들이 각 ‘살인 음모’로 징역 5년 형을, ‘뇌물죄’로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았다고는 하나, 각 감형 석방, 사면·복권된 사실이 있어 이를 정상 참작하였고, 재향군인회 등의 건의서 등을 통해 이들이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여 이들의 안장 여부를 결정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망인의 경우, 국가보훈처가 망인의 특별복권 사실을 최근에서야 뒤늦게 확인함에 따라 2006. 3. 14. 망인에 대한 안장심의 시, 당시 심의위원들에게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제공되지 못하여 당시 심의위원들이 이를 간과하고 불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망인에 대한 국립묘지의 영예성 훼손 여부를 판단한 것”으로 판단.

 

 또한 “사면·복권이 되었다고 하여 당연히 국립묘지의 안장권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수형사실이 있는 안장 신청자의 경우, 국가를 위하여 희생·공헌한 정도, 충의와 위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국립묘지법의 설립 취지, 국민 정서 등을 감안하여 제한적으로 안장이 가능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피신청인1이 그 내부에서 정한 재량권 행사의 심의기준에 따라 망인의 특별복권 사실 등 정상참작 사유와 망인이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정도 등을 면밀히 검토하지 아니한 채 망인에 대한 안장 심의를 진행한 것으로 보이므로 망인의 특별복권 사실 등을 검토하여 망인의 안장 여부 판단을 위한 심사 절차를 다시 진행”할 것을 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