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기지서 ‘180고지’ 60주년 전투기념식 거행
- 1951년 2월, 美 27연대 이지중대, 적 중공군 대대 규모 격퇴
- ‘육박전 영웅’ 밀렛 대위, 수류탄 파편에 맞는 중상에도 끝까지 진두지휘
❒ 6.25 전쟁 당시 180고지 전투에서 불굴의 투지와 용맹성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끈 美 8군 25사단 27연대 이지(easy)중대 중대장 밀렛(Lewis L. Millet) 대위의 영웅적 전투 지휘를 기리기 위한 ‘180고지 전투’ 60주년 기념식이 180고지가 위치한 오산기지(K-55) 내에서 8일 오전 9:30부터 거행된다.
❒ 美 전투협조실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행사에는 美 7공군사령관ㆍ8군사령관, 韓 공군작전사령관ㆍ공군방공포병사령관을 비롯한 한ㆍ미 장병 100여 명이 참석한다.
❒ 군목인 킹(King) 목사의 기도로 시작되는 이날 기념식에는 참석자 소개, 미 51전투비행단장(Malackowski 대령)의 환영사, 180고지 전투소개, 美 8군사령관 Johnson 중장 연설, 화환 전달식, 예총 순으로 약 30분 가량 진행된다.
❒ 미 ‘180고지’ 전투는 1951년 2월 7일 오산기지내 180고지에서 미 8군 25사단 27연대 이지(easy)중대와 중공군 400명 규모(추정)와 교전한 전투로서, 전투 결과 적(중공군) 사살 47명, 포로 60여명, 기관총 등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특히 육박전으로 중공군을 격파했다는 자신감을 고취한 전투다.
❒ 이 전투에서 중대장 밀렛 대위는 180고지 일대에서 중공군으로부터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고, 중대원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자, 중대의 선두에서 ‘나를 따르라’며 중대원을 독려하는 한편, 총에 착검을 한 후, 적 진지로 쏜살같이 돌격, 수많은 적을 육박전으로 제압하는 용맹성과 투혼을 발휘했다.
❒ 이런 중대장의 모습을 본 중대원들도 일시적인 수세에서 벗어나 사기가 충천해져서 중대장과 함께 대대 규모의 적을 무찌르고, 180고지를 확보하는 쾌거를 올리게 됐다.
❒ 특히, 이 전투에서 밀렛 대위는 수류탄 파편에 맞는 중상에도 불구하고, 고지를 확보할 때까지 끝까지 진두지휘해 부하들의 귀감이 됐다.
❒ 이 전투는 훗날 착검 후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고 해 “육박전 고지(Bayonet Hill)”라 명명되었고, 미군 역사상 ‘마지막 총검전투 전승지’로 기록되는 진기록도 세웠다.
❒ 중대를 이끈 밀렛 대위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의회 명의로 수여하는 ‘미군 명예 대훈장’을 받았으며 지난 98년 그의 이름을 빌어 오산기지내 ‘180고지 도로(Hill 180 Road)’를 ‘밀렛 도로(Millett Road)’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 한편, ‘육박전의 영웅’ 밀렛 대위는 전역 후에도 행사에 참석해 오다가, 2009년 11월 14일 美 캘리포니아주에서 88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영웅’에서 ‘전설’로 남게 됐다.
별 지
‘180고지 전투’ 전사 / (예)대령 밀렛 소개
□ 전 황
구 분 |
적 (중공군) |
아 군 |
‘50.10.19 |
․압록강 도하(18만 여명) |
․38선 돌파(10.1)/청천강 진출 |
‘50.10.25~12.15 |
․1차 / 2차 공세 |
․38선으로 후퇴 |
‘51.1.4 |
․계속 공격 |
․후퇴후 평택~삼척 방어선 구축 |
‘51.1~2. |
․신정 / 2월 공세 |
․1차 반격작전 : 1. 15~2. 11 ※ Wolf Hound, Thunderbolt, Round Up작전 |
※ Thunderbolt 작전 : 1.25~2.10/인천~수원~지평리~횡성일대 진출
□ ‘180고지 전투’ 개관
▲ 일자 / 장소 : ‘51. 2. 7 / 180고지(오산기지내)
▲ 참가부대 : 미8군 25사 27연대 E중대
▲ 전투경과
○ 51. 1. 25~ : 미8군 Ridgeway장군 지휘하 “Thunderbolt작전” 개시
※ 27보병연대 : 미8군 전위부대, 평택 → 수원방향 공격
○ 51. 2. 7, 07:25 부 : 27연대 선봉 E중대 180고지 공격
- 교통호에서 강력하게 방어중인 중공군(200여명)과 조우 / 교전
- 중대장 Millett 대위, 중대의 선두에서 진두지휘 / 공격 독려
- 적의 집중사격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공격, 적 격퇴 및 180고지 탈환
▲ 전과 : 적 사살 47명, 포로 60여명(도주 100여명), 기관총 등 다수장비 노획
▲ 의의
○ 병력ㆍ화력의 열세를 중대장의 진두지휘와 공격정신으로 극복
○ 有備無患 / 勇壯之 無弱卒 의 귀감 (對 중공군 자신감 부여 계기)
※ 총검 착검 후 격렬한 전투실시, 후일 “육박전 고지(Bayonet hill)전투”라 명명
□ ‘180고지 전투’ 전사 세부내용
180고지, 한국전 당시 그렇게 불렸던 그 고지는 1951년 1월 하순경 지칠 데로 지친 중공군 및 북한군과 전투력 복원 후 사기 충전한 리지웨이 장군의 미 8군과의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후퇴하던 미군은 부대 재편성을 완료하고 과도히 신장된 병참선으로 인해 전투근무지원 능력이 저하된 중공군과 북한군을 격멸할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리지웨이장군은 일명 “썬더볼트 작전”으로 불렸던 UN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의 전위부대로서 제27보병연대(울프하운드)를 전선 북방인 오산지역에 투입하였다. 울프하운드 연대의 1개 부대였던 이지 중대는 2차 대전 경험이 있는 루이스 밀렛 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1951년 2월 5일, 이지 중대는 오산 외곽 남북쪽으로 뻗은 도로 서쪽의 얼어붙은 논길을 전진해 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콩 볶는 듯한 적의 기관총 사격이 아침 공기를 갈랐고, 제 1소대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중공군은 도로 양쪽의 감제고지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기관총 사격은 강력했다. 휘파람 소리를 내는 듯한 총알이 날아와 얼음에 박혔다. 밀렛 대위는 “제2소대, 총검을 착검하고 왼쪽으로 먼저 이동하라”고 외쳤고, 곧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는 외침과 함께 고지 정상을 향해 달렸다.
그는 소대원들이 공격대형을 갖출때 까지 기다렸다가 공격 준비가 완료되자 “우리는 적을 이 총검으로 무찌를 것이다. 자, 가자!” 라고 외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고지를 오르는 2개 소대 병사들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며, 병사들의 선두에 밀렛 대위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는 한손에 소총을 쥐고서 손짓을 하며 부하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지 중대의 공격으로 중공군은 참호에서 빠져나와 고지의 후사면으로 허둥지둥 도망쳐 버렸다. 밀렛 대위와 그의 2개 소대가 고지 정상에서 합류하였을 때는 몇 몇 중공군 낙오병들만 남아있었으며, 이지 중대는 이곳에 신속히 진지를 강화하였다. 한편, 후방에서 이지 중대의 과감한 돌격을 관측하고 있던 대대장은 밀렛 대위에게 달려와 손을 잡으며 그의 용기를 칭찬하였고 그날 밤 대대장은 밀렛 대위의 수훈십자훈장을 추천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날의 전투는 48시간 뒤에 벌어질 전투에 비하면 예행연습에 불과한 것임을 아무도 몰랐다.
2월 7일 정오쯤 이지 중대는 대대의 첨병중대 임무를 부여받고 오산 남동쪽의 소남리라는 연기 자욱한 마을 근처의 능선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지도상에는 이곳이 “180고지”라고 명시되어 있었으며, 훗날 이지 중대원들과 미 육군 전사에 “육박전 고지”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고지였다. 전차에 올라탄 2개 소대를 지휘하면서 밀렛 대위는 별 어려움 없이 고지를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180고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중대원 중 한 병사가 고지 정상 부근의 수풀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인다고 보고하였다. 그곳에는 다수의 중공군이 진지를 편성하고 있었으며 이미 이지 중대는 중공군의 사거리 범위 내에 들어와 있었다.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밀렛 대위는 신속히 전차를 도로에서 이탈시키고 2개 소대를 짚단더미를 연하여 전개하도록 명령했다. 바로 그때 중공군의 사격이 시작되었고 많은 중대원들이 쓰러졌다.
밀렛 대위는 가까이에 있던 전차에 뛰어올라 MG50 기관총을 잡고 적을 향해 사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적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붓다가 전차 승무원에게 기관총사격을 계속할 것을 지시하고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신속한 공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틀 전의 전투에서처럼 중공군을 도망가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는 1소대장에게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령했다. 잠시 후, 조용하던 중 공군의 기관총 사격이 1소대로 퍼부어지기 시작했고 사상자가 늘어났다.
그 와중에 제1소대를 지원하던 MG50 기관총이 기능고장으로 사격이 중단되었다.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중대가 무너지고 있었던것이다. 그는 빗발치는 총탄 속을 뚫고 제1소대 지역으로 달려갔다. 소대선임하사를 보고서 그의 참호로 구르다시피 뛰어 들어가면서 외쳤다. “공격 준비하라! 우리는 고지로 돌격한다! 착검하라! 가자! 모두 나를 따르라!” 밀렛 대위는 고지를 향해 얼어붙은 대지 위를 뛰기 시작했고 그의 뒤에는 소대선임하사와 12명의 소대원들이 따르고 있었다. 나머지 소대원들은 그들에게 집중된 중공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전진이 저지되고 말았다. 고지정상 부근에 먼저 도착한 밀렛 대위는 바위더미를 의지해 몸을 숨기고 소대원들이 도착 할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자! 가자!”라고 외치며 거칠 것 없이 몸을 숨겨가며 전진을 계속하였다. 180 고지를 형성하는 3개의 작은 봉우리들 중 하나를 점령하고 보니 나머지 2개의 봉우리는 약 20미터 정도 높은 위치에 있었고, 밀렛 대위는 중공군 기관총 진지를 발견했다. 그는 바주카포 사수에게 사격토록 명령했다. 또 다른 병사는 밀렛 대위의 위치에서 약 10 미터 떨어진 참호속에 움크리고 있는 8명의 중공군 병사들을 발견했다. 밀렛 대위는 그곳으로 달려가며, 소총을 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적들을 죽이고, 그는 3소대로 하여금 중대장 위치로 올라오도록 무전으로 지시했다.
3소대가 올라와 돌격대형이 갖추어지자 밀렛 대위는 “고지로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총검을 착검한 채 두 개의 작은 봉우리를 향해 달려갔다. 적 제 1 참호선에 다다르자 중대원들은 총검으로 적을 찔렀고, 총검에 찔린 적의 비명소리가 고지에 가득했다.
밀렛 대위는 소대원들보다 훨씬 앞에 있었기 때문에 아군과 적군이 양쪽에서 던지는 수류탄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천둥같은 폭발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향해 정면으로 사격을 가하려던 적의 대전차포 진지로 달려들어 대전차포를 제압하였다. 이때 여러 개의 수류탄이 중공군 진지로부터 날아왔고 밀렛 대위는 8개의 수류탄을 재빠르게 피했지만, 아홉 번째 수류탄이 터지면서 그의 등과 다리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당했고 피가 흘러 전투복을 적시고 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돌격 앞으로! 수류탄과 총검으로 적을 제압하라!”
고지정상에 다다른 그는 V자형의 적 참호에 뛰어들어 적군 1명을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두번째 적군병사가 그에게 달려들자 성난 호랑이처럼 총검으로 적의 목을 찔렀다. 세번째 중공군 병사는 밀렛 대위를 겨냥해 사격하려다가 그가 던진 피묻은 총검에 가슴이 찔렸다. 이윽고 나머지 중대원들이 올라와 고지를 향해 돌격했고, 그도 그들을 따라 돌격했다. 그들은 180고지에서 적을 완전히 격멸할 때까지 닥치는 대로 찌르고 수류탄을 던졌다.
적을 완전히 격멸하고 밀렛 대위와 그의 중대원들은 톱니처럼 생긴 능선의 정상에 서서 자신들의 피 묻은 소총을 아래 위로 흔들면서 그들이 탈취한 “육박전 고지”아래를 향해 환호했다.
전투가 끝났을때 고지 전사면에는 47명의 적군이 죽어있었고 대략 100여명이 도주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리고 심한 상처로 인해 후송된 밀렛 대위는 그 후 몇 달 동안을 병원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1951년 7월 5일, 백악관에서 명예훈장을 수상하였으며, 오산 공군기지는 180고지가 명성을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2년 여름에 창설되었다.
루이스 밀렛 대령(예)은 1920년 12월 15일 미국 메인(Maine) 주 메카닉 폴스(Mechanic Falls) 출생으로 17세에 매사추세츠주 방위군 소속 101 포병부대에서 근무했다. 1940년에 그는 일병으로 미 육군 비행군단 에 입대하여 대공화기사수 임무를 수행 하였으며, 1941년 1월에는 캐나다군에 입대했다.
1942년에 미 육군에 재입대하여 제1기갑사단에 근무한 후 다양한 직책에서 임무를 수행한 후에 하사로 진급했고, 그 이후 소위로 임관했다. 2차 대전 후에 밀렛은 메인(Maine)주 주방위군 예하 103보병부대에서 근무했다. 103보병부대에서 4년간 근무 후에 그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 27보병 연대인 “울프하운드(Wolfhounds)”로 전속됐다.
울프하운드연대의 일원으로 밀렛은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으며, 한국전에서 용맹스럽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1951년 2월 180고지 전투간 E 중대 중대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강력하게 편성된 적 방어진지를 뚫고 육박전을 감행하여 미국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그가 지휘하였던 E 중대에 의해 47명의 적이 전사하고 60명의 적이 부상을 당했으며, 47명의 적 전사자 중 18명이 대검에 의해 희생됐다.
밀렛 대위는 한국전쟁 참전 후에 본토 육군사령관 부관과 군사고문단의 훈련 및 작전장교 임무를 수행했고, 1956년에 밀렛은 소령으로서 미 육군 고급반 과정과 유격훈련 과정을 이수했다. 이어서 미 육군 보병학교에 위치한 101 공정사단에서 근무했으며, 그곳에서 근무간 “레콘도(Recondo) 학교” 를 창설했다. 101 공정사단 근무 후 특수작전부대 운용에 깊이 관여했으며 미 지휘참모 대학 입교전 베트남의 유격훈련 학교 및 코만도 훈련 과정을 개설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밀렛은 2군단 부군단장 직책을 끝으로 1973년에 대령으로 전역했으며, 명예훈장외에도 은성훈장, 공군무공훈장, 공훈십자가훈장, Purple Heart, 베트남 무공훈장 등 많은 훈장을 수상했고, 2009년 11월 14일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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