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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이야기

영어, 한글 그리고 미군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위대한 한국군 여러분과 다시 근무하게 돼 매우 기쁩니다.”
 존 존슨 신임 주한 미8군 사령관(육군 중장/왼쪽 사진)의 지난 9일 취임사 한대목이다. 그는 이부분을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말했다.

 “같이 갑시다.”
 이는 월터 샤프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인이 포함된 행사에서 연설을 마친 후 항상 하는 ‘후렴구’ 같은 말이다. 동맹국인 미국과 한국이 같은 목적을 위해 같이 가자는 의미다.(과거 기관원이 임의동행을 요구하는 말처럼 들린다 해서 이 말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G20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오바마 대통령도 11일 용산기지를 방문,  6ㆍ25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를 자리에서 직접 일으켜 세우며 "조국을 위해 용맹하게 싸웠던 한국군 참전용사들도 여기 오셨다"면서 "감사해요, 친구들. 같이 갑시다"고 말했다. 그는 "같이 갑시다"는 말은 우리나라 말로 했다.

 이처럼 미군 고위층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관행은 효순·미선양 사건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아무래도 상대방 언어를 사용하면 서로간의 ‘벽’을 허무는 데는 유리한 측면이 있다.

 취재를 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영어가 능숙했다면 더 많은 특종 기사를 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취재를 하다보면 한·미 군사관계 문제에 있어서 국방부의 발표와 미군의 설명간에 괴리를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과거지사이기는 하지만 망년회를 겸한 사적인 자리에서 몇몇 기자들과 우연히 만나 폭탄주를 교환하던 한 미군 장성은 자신의 카운터 파트너인 국방부 고위 간부를 지칭하면서 심지어 “General X is a liar”(X장군은 거짓말쟁이)라고 한 적도 있다. 그는 국방부 고위 간부의 설명에 따른 언론 보도가 잘못된 것이라면서 그자리에서 부인을 불러 자동차 트렁크에 있는 관련서류까지 가져오게 해 그 증거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자신의 발언을 기사로 써도 좋다고까지 했다.
 (미군들이 폭탄주를 본격적으로 마시면 한국군들보다 훨씬 잘 마신다. 체격과 체력이 좋은 만큼 주량도 세다. 그 미군 장성은 술에 취해서 그렇게 얘기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참고로 미군들은 대체적으로 폭탄주를 즐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굳이 그렇게 마실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것도 문화적 차이로 볼 수 있나)

 아무튼 이 사실이 기사화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때도 동석했던 영어에 능숙한 후배 기자가 없었으면 그의 주장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을 것이다. 요새 기자들은 언론사에 입사할 때부터 영어를 잘하는 것 같다. 지금 영어실력 기준으로 뽑는다면 아예 입사시험에서 탈락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8군 사령관 이취임식 장면. 사진/주한미군 홈페이지>

 아뭏든 국방부를 출입하면서 미군과 관련한 추가 취재를 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게 빈약한 영어 실력이다. 하지만 노력을 해도 쉽게 되지 않은 게 외국어 공부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영어에 대해서는 입맛이 쓴 추억이 있다. 1997년 한국에 ‘IMF(외환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왔을 때였다. 기자는 김포국제공항을 출입하고 있었다.

 당시 휴버트 나이스 국제통화기금(IMF) 한국담당 국장의 방한은 큰 이슈였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모두가 커다란 뉴스였다. 당연히 김포국제공항 입국장은 기자들로 넘쳐났다.

 평소처럼 통역을 기대하고 나이스 국장이 여객기 트랩을 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뿔사 착각이었다.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각 신문·방송사들은 동시통역이 가능한 기자들을 공항에 추가로 파견했던 것이다. 이들은 나이스 국장이 나오자 능숙한 영어로 속사포 질문을 퍼부었다. 대신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김포국제공항 출입기자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멋쩍은 표정을 짓는데 갑자기 방송국의 TV 카메라 렌즈가 나이스 국장의 바로 앞에 있던 나를 향해 클로즈업하는 게 아닌가. 순간 당황했다. 그렇다고 KBS 9시 뉴스에 한심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는 없는 게 아니겠는가. 결국 나이스 국장의 말을 다 알아듣는 것처럼 수첩에 열심히 쓰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옆에 서 있던 ㄷ일보 후배 기자였다. 그 역시 본토 영어발음을 듣는 데 ‘먹통’ 수준인지라 열심히(?) 수첩에 메모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컨닝’을 했던 것이다.(남편과 달리 그 기자의 부인은 영어와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하는 KBS 기자다)
 이날 이후 그는 다른 언론사 기자와 함께 공항을 다니면서 소문을 쫙 퍼뜨렸다. “박 선배가 영어를 다 알아듣는 표정을 하더니 정작 수첩에는 점을 찍고 있더라”고.

 이후 절치부심, 영어회화 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실력은 생각만큼 늘지 않아 지금도 고역을 치르고 있다. 고작 샤프 사령관(오른쪽 사진)에게 “Let's go together”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 정도라고나 할까.

 영어는 군대에서도 또 다른 기회를 주는 것 같다. 우리 군이 한반도 내에서 뿐만 아니라 평화유지활동(PKO) 등으로 그 활동 영역을 세계로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파병 부대원은 다른 장병들이 맛보지 못한 독특한 경험을 군에서 체험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해외파병부대의 선발 경쟁률은 지원자가 많이 몰릴 경우 10대1을 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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