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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코멘터리

국민청원 게시판 글로 시달리는 군대

군대에서 병사의 자격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신체적·정신적 기본 능력만 갖추면 충분하다. 그런데 요새 병영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병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거나 집단 생활문화에 거부감을 표시한다. 심한 경우에는 사회에서는 없던 신체 질환증세까지 입대 후에 나타났다면서 지휘관에게 특별한 조치를 요구하기도 한다. 소위 ‘병영 부적응’ 병사들이다. 이에 따른 지휘관들의 고민이 크다. “‘아들이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으니 특별히 잘 돌봐달라’는 병사 부모의 지속적인 전화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고 털어놓는 간부도 있다.


야전에서는 병사들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행군에 불참해도 군 간부들이 시빗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자세한 사유 묻기를 피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다보니 문제가 발생하면 아예 해당 병사를 현역 복무 부적합 심의 대상으로 분류해 전역조치시켜 병사 관리 스트레스를 피하려는 지휘관도 생긴다.

공군이 지난 24일 부대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황제 복무’ 의혹이 제기된 병사에 대한 감찰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결론은 이른바 ‘병영 부적응자’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거나 지휘감독이 소홀했다며 건강 문제나 병영생활 부적응 등 관리가 필요한 병사들을 투명하게 지원하기 위한 제도 보완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감찰 결과를 보면 지난해 9월 부대에 전입한 ㄱ상병은 평소 매주 주말 가족 면회 시간에 자신의 세탁물을 부모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2월 말 코로나19로 인해 면회가 제한되자, ‘피부질환 때문에 생활관 공용 세탁기 사용이 어려우니 부모를 통해 자가에서 세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소속 부서 간부인 ㄴ중사에게 요청했다. ㄴ중사는 3월부터 5월까지 13회에 걸쳐 세탁물을 부모에게 전달했다. 이를 놓고 ㄴ중사는 ‘병사 애로사항’ 해결 차원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린 이는 “병사가 부사관 간부에게 ‘빨래 셔틀’을 시키는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며 특혜라고 비판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특혜’로도 비칠 수 있고, ‘배려’로도 볼 수 있다. 특혜라는 시각으로 보면 ‘간부의 빨래 셔틀’이고, ‘배려’라는 시선으로 보면 ‘부적응 병사를 위한 친절’이다. 이런 행위를 처벌하려면 빨래의 영외 반출이 병영생활지침에 따른 규정 위반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살피면 된다. 지휘관 허가가 있으면 규정 위반이 아니지만, 허가가 없으면 규정 위반이라는 게 군 당국의 입장이다. 그렇더라도 문제는 생긴다. 지휘관 허락이 있더라도 주변에서 ‘지휘관의 과도한 배려는 특혜’라고 여기고 청와대 국민청원에 글을 올릴 수 있는 소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동료 병사들은 ㄱ상병이 아프기에 편의를 제공해준다고 하지만, 돈 없고 집안 배경이 좋지 않은 병사에게도 같은 편의를 제공해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 배경에는 ‘군대만큼은 평등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병영 부적응 병사들을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다루었다가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몰라 지휘관들은 머리 아파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병사의 경우 부대의 배려가 없어서 본인 질환이 악화됐다고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군대 병사들의 주류는 이제 2000년대생들이다. 이들은 ‘평등’과 ‘공정’을 얘기하면서도 자신에게 맞는 맞춤형 군대 행정을 요구한다. ㄱ상병의 부모도 ‘애가 아프니 좀 도와달라’는 식의 전화를 간부들에게 수십통 한 것으로 조사됐다. ㄱ상병은 맞춤형 배려를 요구하고, 동료들은 평등을 앞세운다. 그러다보니 건강문제나 병영 부적응 등으로 관리가 불가피한 병사들에 대한 군내 관리 매뉴얼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


이런 환경에서 이제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군대 내 ‘소원 수리함’과 같은 고발 창구 통로가 돼버렸다. 병사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고, 인터넷 게시판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글을 올리는 세태와 맞물렸다. 부대 내 시스템을 통해 신고하면 지휘관이나 선임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작용하고 있다.


심지어 부대장의 훈련에 대한 지휘판단까지 국민청원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해 6월 ‘현역 중장의 보직 해임을 요구한다’는 글이 청원 게시판에 올랐다. “현역 군단장이 비합리적인 부대 운영과 지휘, 명령으로 젊은 장병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며 “(군단장이) 특급전사만을 강요하며 특급전사가 되지 못한 장병은 휴가와 외박을 제한시키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온라인상에서는 “훈련이 과도하다”는 의견과 “군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반론이 맞섰다. 육군본부 감찰 결과, 군단장의 지휘·명령은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난 18일에는 한 육군 여단장이 일병에게 “너는 뭐가 불만이냐. 태도가 왜 그러냐”라고 지적한 뒤 여단장실로 불러 부모까지 거론하며 인격모독을 했다고 주장하는 글도 올라왔다. 이 역시 육군본부가 감찰 중이다. 청원 게시판에 올리면 청와대를 의식해 육군본부가 직접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인식이 장병 사이에 퍼져 있다고 한 육군 간부는 병영 분위기를 전한다. 이를 놓고도 ‘군 기강 해이’와 ‘군의 잘못된 관행이 빚은 불신’이라는 주장이 맞선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병사 관리에 지친 지휘관들은 “차라리 모병제를 실시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군 당국은 병영생활 도움관리위원회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병사들 스스로 21세기에 걸맞은 시민의식을 갖추겠다는 의지를 보여야만 가능하다. 


각종 사건의 시시비비를 떠나 지휘관들이 위축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젊은 장병들의 병영생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군은 기본적으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싸워 이길 수 있는 강한 힘을 평소에 키우는 곳이다. 병사들의 애로사항을 잘 살피는 것 못지않게 야전 지휘관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