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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코멘터리

미국 ‘키세’의 승리가 의미하는 것

미국 ‘키세(KISE)’의 승리였다. 정부는 지난 11일 “제200차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합동위원회에서 한·미 양측은 오염 정화 책임과 주한미군이 현재 사용 중인 기지의 환경관리 강화 방안, SOFA 관련 문서의 개정 가능에 대해 협의를 지속한다는 조건하에 4개 기지 즉시 반환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반환 합의는 이날 즉시 효력을 발휘했다. 이와 함께 용산 미군기지 반환을 위한 협의 절차도 본격적으로 개시됐다.


키세는 미측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논리였다. 키세는 미국이 내세운 반환기지 환경오염 치유기준인 ‘KISE(Known·Imminent·Substantial·Endangerment to Human health)’를 말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간 건강에 대해 알려진·임박한·실질적인·급박한 위험’을 의미한다. 그동안 10년 넘게 한국 측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영향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미국 측은 키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박해 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부는 반환되는 기지들의 환경오염 정화비용으로 추정되는 1100억원을 먼저 우리가 부담한 뒤, 차후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비용 부담과 책임 소재 등을 가리겠다는 입장이다. 미측이 협의를 지속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할진 불투명하다. 미측은 ‘배째라’식으로 10년을 넘게 버텨 문제가 된 기지의 열쇠를 한국 정부에 넘겼다. 이후 협상에서 미측이 정화비용을 부담하리라 여기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말이 좋아 ‘선 환경정화비용 부담, 후 분담금 청구’다. 사실상 안 주겠다고 버티면 그만이다.


키세는 한·미 간 문화 차이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키세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 환경폐기물을 묻을 곳이 많은 미국의 환경오염 치유기준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키세를 반영했다가는 당장 환경단체가 들고 일어날 일이다.


정부는 방위비 분담금 협상 국면에서 미군기지 반환 문제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동시에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 숙원사업을 해결했다는 점을 은근히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미측이 무시하면 그만이다. 지역 숙원사업 해결 차원이라면 10년 넘게 이 문제를 왜 질질 끌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미국은 한국 내 기지 반환 과정에서 비용을 분담할 경우 향후 전 세계 미군기지의 반환 시 적용할 선례가 된다는 점 때문에 환경정화비용 부담에 확실히 선을 그어왔다. 실제 SOFA에 환경조항이 신설된 2003년 이후 미국은 지금까지 80곳의 반환 대상 미군기지 중 54개 기지를 반환하면서 환경정화비용을 단 한 번도 분담한 적이 없다. 미측 입장에서는 기지를 반환하면 이미 협상은 종료된 거나 마찬가지다. 당장 환경단체들은 ‘미군에 면죄부를 줬다’며 반발하고 있다.


용산기지 등 반환되지 않은 나머지 22개 기지 역시 이들 4개 기지처럼 한국 정부의 ‘선 비용 부담·후 협의’로 갈 것이다. 여기서도 미국이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군이 그동안 마구 버린 기름과 중금속 등으로 야기된 오염의 정화비용을 한국이 떠안고 갈 것이라는 말이다. 예상대로 주한미군 보도자료를 보면 오염 정화 관련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미국 의도를 거스르지 않았다. 뒤집어 얘기하자면 문재인 정부의 어떤 주체적인 결정이나 선택도 미국은 용납하지 않았고, 우리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조건부 연장 결정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GSOMIA 종료 선언을 지속하는 역량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GSOMIA 종료 유예를 실용적·전략적 선택을 했다면서 ‘솔모론의 지혜’인 양 포장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정부의) 외교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적절한 카드로 당시 잘 활용됐다”고 평가했다.


GSOMIA는 이번 기회에 그 정체를 여실히 드러냈다. 한·일 양국 간 군사비밀보호협정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행정부와 입법부가 모두 달려들어 GSOMIA 종료를 막았다. 제임스 리시 미 상원 외교위원장은 성명에서 “GSOMIA는 미국의 국가안보와 인도·태평양 지역 평화와 안정에 중요하다”고 밝혔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도 지난달 15일 서울에서 열린 제51차 한·미 안보협의회(SCM) 회의 종료 직후 열린 양국 국방장관 공동기자회견에서 “GSOMIA의 만료로 이득을 보는 곳은 중국과 북한”이라고 말했다. 수년 전 GSOMIA 체결 당시에는 중국은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미국이 궁극적으로 한·미·일 3각 동맹을 만들어 중국을 봉쇄하고자 GSOMIA 체결을 압박했다는 게 확인된 셈이다. 이는 그동안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이 동등한 지위를 지니는 한·미·일 3각관계도 아니고 미국을 정점으로 일본을 중간 파트너로, 그리고 한국을 제일 말단의 하위 파트너로 하는 수직적 동맹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GSOMIA의 조건부 연장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정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정부는 일본의 태도를 보고 종료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럴 거라고 믿기는 어렵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는 지난 9월 말 미 대사관저에서 대한민국 미래혁신포럼 소속 여야 의원 10여명을 만난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좌파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게 사실이냐”라고 물은 것으로 최근 전해졌다. 국방부가 F-35 추가 구매를 시사하는 등 문 대통령이 미국에 우호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좌파’여서 GSOMIA를 종료하려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해석됐다. 상식밖의 무례였다.


한·미동맹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키세나 GSOMIA 유지처럼 압력에 굴복하는 동맹의 미래는 밝지 않다. 동맹은 상호 이익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강화된다. 한·미동맹 자체에 비대칭 성격이 있다고는 하지만, 미국 심기를 건들이지 않기 위해 우리가 심각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동맹이 어떻게 정상적인 동맹이겠는가. 미측에 끌려다니면서도 자주성을 발휘한 것처럼 포장하는 정부도 한심하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