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 바람 부는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 육군 장교 양성의 대표기관인 육군사관학교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공릉동 육사 화랑연병장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신임 장교 233명은 ‘국민에 충성, 국가에 헌신’을 다짐했다. 육사는 이날 졸업식 슬로건에서 국민을 앞세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했다.
지난 6일 서울 공릉동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제74기 육사 졸업 및 임관식이 끝난 뒤 졸업생들이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함께 정모를 하늘 높이 던지는 축하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불순한 의도로 국민 보다 ‘국가(주의)에 충성’을 먼저 앞세워 쿠데타와 독재권력을 정당화했던 과거 잘못된 선배들의 유산과 절연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고동흔 육사 정훈공보실장(대령)은 18일 “군인의 최고 덕목은 ‘충성’으로 졸업식 슬로건은 국민이 가장 우선적인 충성의 대상임을 새삼 확인한 것”이라며 “‘국민에 충성, 국가에 헌신’은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과어울리는 정신”이라고 말했다.
■ 사관학교 명칭은 일제 유산
육군사관학교 명칭의 원조는 일본 제국주의다. 일본 육사는 일제가 육군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1874년 개교한 군사학교로 1945년 폐교되었다. 일본은 패전 이후 평화헌법으로 군대를 가질 수 없어 1952년 방위대학교를 개교해 사관학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 자위대에는 사관이란 명칭도 없다. 북한군이나 과거 중국군의 사관은 한국군의 부사관을 뜻한다.
육사는 1946년 5월1일 개교한 국방경비대사관학교를 모체로 하고 있다고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장교 양성기관을 ‘사관학교’라고 부르는 유일한 국가다. 미국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미합중국 군사대학과 독일 장교를 배출하는 연방군대학의 경우 국내에서 한국군 육사와 빗대어 편의적으로 사관학교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배경에서 사관학교 명칭을 바꾸는 것을 고려할 때가 됐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김완태 육사 교장(중장·육사 39기)은 “1896년 고종 재임 시절 대한제국은 초급 무관 양성기관인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했다”며 “고종의 ‘아관망명’으로 그 기능을 상실했다가 1898년 다시 설립돼 명실상부한 무관 양성기관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 당시 무관학교 출신 군인들이 의병장으로 나서 대일전쟁에 크게 기여했다”며 “국군의 뿌리 찾기 차원에서 육사 명칭을 육군무관학교로 바꾸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
임시정부도 3기생을 끝으로 폐교됐지만 1920년 임시육군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일부 육사 출신 예비역 장성들은 ‘태릉 육군대학’으로 개칭해 제2의 도약에 나설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1905년 광화문 앞 훈련원에서 제식훈련 중인 대한제국의 군인들. 독립기념관 제공
■ 생도는 기계가 아니다
그동안 육사 생도에게는 모든 생활이 ‘절도에서 시작해서 절도로 끝난다’는 말이 통용됐다. 그만큼 ‘절도’를 중시한 탓이다. 밥 먹을 때는 ‘식사 군기’, 잠잘 때는 ‘취침 군기’, 심지어 ‘전화 군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상생활에서 엄격한 절도를 강조했다. 여기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김 교장은 올해 졸업식 식사에서 “기계마저도 인간이 되려고 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인간을 기계처럼 만들려고 하는 구시대적 관념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고 밝혔다. 강요에 의한 절도보다는 자율에 의한 질서를 요구한 것이다.
사실 육사는 2013년 5월 발생한 생도 성폭행 사건 이후 규율이 수십년 전으로 돌아갔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런 만큼 생도들의 분위기는 경직됐다. 이를 바꾸기 위해 육사는 올해 입학식에 앞서 실시하는 기초군사훈련도 생도 스스로가 생각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실시했다. 과거 민간인을 군인으로 탈바꿈시킨다는 미명 아래 강압적 분위기에서 선배 생도들로부터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요받던 관행과는 달랐다.
이달 초 임관한 ㄱ소위는 “1학년 생도가 기초군사훈련 기간 중에 햄버거까지 먹어가며 훈련을 했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다”며 “우리는 고생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데 좀 억울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고 육사는 전했다.
김태진 생도대장(준장)은 “1학년 생도보다는 학년이 높아질수록 훈련을 더 많이 받아 더욱 절도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고학년으로 갈수록 저학년에겐 권위적이면서 자신에겐 관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선배 생도에게 중대장 등 간부 직위를 부여하는 것도 간부 실습을 하도록 한 것이지 후배들에게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육사는 올해 ‘3사 생도와 동기 맺기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고교 졸업 후 2년간 일반 대학 생활을 했던 3사 생도와 고교 졸업 후 곧바로 군 생활을 하게 된 육사 생도들은 1박2일간 생활하면서 교류했다. ㄴ생도는 “3사 생도가 아르바이트 경험 등을 통해 자신보다 훨씬 폭넓게 세상을 바라보고 얘기하는 데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얘기했다”고 고 실장은 소개했다. 육사는 생도들의 직간접 체험 확대를 위해 일반 사회와의 교류 및 봉사활동을 늘릴 계획이다.
■ 독립·광복군 전쟁사 정규 과목에 포함
육사는 지난해 말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 이후 올해부터 독립군·광복군 전쟁사를 정규 교과과정에 포함시켰다. 생도들은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을 교재로 대한제국과 의병전쟁 시기, 일제강점과 독립전쟁 시기, 해방 전후 국군 창설 시기 등을 공부하고 있다. 1897년부터 1910년 사이 대한제국과 의병전쟁 시기와 관련한 대한제국 군사제도와 군사교육기관인 육군무관학교 등도 배움의 대상이다.
육사는 정미7조약 체결 후 항일 투쟁 사례로 ‘남대문 전투’를 소개하고 군대 해산 이후 국내외 의병 작전과 동향, 안중근 장군과 연해주 의병 국내 진공작전 연계 설명 등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항일운동도 가르치고 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과 독립전쟁 시기와 관련해서는 독립군 양성과 신흥무관학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임시육군무관학교, 신민부·정의부·참의부, 한국독립군·조선혁명군, 한국광복군 등을 다루고 있다.
1945년부터 1948년 사이 해방 전후 광복군을 중심으로 한 창군 과정과 연계해 임춘생·김홍일 장군 등 광복군 출신 학교장 임명 등 육군사관학교 개교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학년 생도들은 독립전쟁 관련 해외 전적지 탐방에 나선다. 청산리대첩 전적지, 봉오동전투 전적지, 한국광복군 창설지 등이 답사 대상이다. 육사 생도대장 출신인 김 교장은 독립군·광복군 역사 교육 필요성을 놓고 “군의 과거 역사를 반쪽이 아니라 모두 아울러야 정통성 싸움에서도 북에 이길 수 있고, 통일 이후를 준비할 수 있다”며 생도들과 끝장 토론을 하기도 했다.
육사에는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인 이회영 선생실과 본격적인 의병활동의 기폭제가 된 박승환 참령실, 이범석·지청천·김좌진·홍범도 장군실 등이 올해 생겼다. 박석봉 육사 교수부장(준장)은 “이곳에서 생도들이 모임과 토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독립군과 광복군 선배들의 정신을 기릴 수 있도록 하는 차원”이라고 소개했다. 앞서 지난 삼일절에는 장병들이 사용한 5만발 실탄의 탄피 300㎏을 녹여 이들 5인의 흉상을 육사 충무관 앞에 세웠다. 육사는 내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무관학교 기념관 또는 독립전쟁 박물관 건립 추진을 검토하고 있다.
■ 민간에 문호 개방 나선 육사
국방부는 2005년 민간인 출신 전문인력의 비중을 40%로 확대한다는 육사 교수 임용 방침을 밝혔으나, 별 진척이 없는 상태다. 육사 교수 159명 중 10명만 민간인 출신이다. 이 때문에 육사 출신 현역 교수 요원들의 강의가 획일적이고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박 교수부장은 “민간인 교수의 경우 정년이 되도록 군무원 5급과 6급 대우밖에 받을 수 없는 규정 때문에 육사를 기피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국립대학처럼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길을 열어 우수한 민간인 교수를 영입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지적했다.
육사는 또 “육사 교수가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 전문가 식견으로 여러 군사 사안들을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추진할 계획”이라며 “민간 무기전문가들의 편향된 시각으로 안보 상황을 잘못 설명하는 것을 막는 것도 군 전문가의 역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그런 차원에서 올해 육사 임관식 생중계도 육사 교수가 했다. 육사는 생도 생활공간이 아닌 교정 등을 민간인에게 과감히 개방해 서울시민들의 ‘핫 플레이스’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준비 중이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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