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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기자수첩

두 여인과 양들의 침묵

'땅콩 회항'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30일 밤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서울 남부구치소 이송을 위해 서울서부지검을 나서고 있다. (출처 : 경향DB)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산다. ‘자기 잘난 맛’은 자존심의 변형이다. 자존심은 인생의 긴 항해에서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정신적 힘이다. 하지만 이 자존심을 잘못 발휘하면 자칫 스스로를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기도 한다.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대기업 회장의 딸로 살았더라면 우아하게 사람을 부리면서 ‘구속’이라는 굴욕도 겪지 않았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세밑을 시끄럽게 장식했다. 굴욕의 발단은 바로 자기 잘난 맛이었다.

가진 것이 많거나 힘이 센 권력자는 굳이 스스로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알아서 자존심을 챙겨준다. 가진 자는 겉으로 적당한 우아만 떨어도 주변에서 존중해 준다. 조 전 부사장은 적어도 대한항공 내에서는 권력자다. 여러 정황으로 보면 이 여인에게는 자신을 꾸중할 정도의 권력이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폭발한 성질을 한껏 부린 것이 화근이 됐다. 과도하게 내세운 오만한 자존심이 화를 불러일으킨 도화선이 된 것이다. 자고로 권력은 세련되게 사용해야 하는 법이다.

권력자의 힘이 크면 클수록 조용히 한마디만 해도 그 파급 효과는 일파만파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맞춰 검찰 수사는 방향을 찾아갔다. 권력은 큰 조직일수록 내부 구성을 공고하게 뭉치게 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조직은 속성상 바로 아랫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기업에서는 사장이 임원에게, 임원이 부장에게, 부장이 부원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다. 정부 조직에서는 대통령이 국무위원에게, 국무위원이 실·국장에게, 실·국장이 부하 공무원들에게 가장 큰 압력이 된다. 조 전 부사장이 항공기 사무장과 승무원 대신 담당 임원에게 위세를 부렸다면 그 임원이 나중에 사무장을 질책하는 것으로 ‘땅콩 회항’ 사건은 묻혔을지도 모르겠다.

권력의 최고 경지는 상대가 알아서 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위 ‘심기 경호’가 가능해지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 힘이 조직의 외부로 나가면 작동하지 않는 게 권력의 속성이다. 조 전 부사장에 대한 일반인들의 중구난방식 비난이 그 예다. 대통령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반 국민들은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권력(權力)이란 말에서의 ‘권(權)’은 권세와 힘을 뜻하지만 본래 저울을 뜻하는 글자다. 법과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치아(Justitia)가 저울을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처럼 나라의 가장 큰 저울을 잡은 자가 대권자(大權者) 곧 대통령이다. ‘권력’ 속의 ‘저울(權)’이란 말은 의미심장하다. 권력은 원칙과 예외, 단호함과 따뜻함, 공동체와 개인, 공익과 사익, 상충하는 여러 이해관계를 빠짐없이 살피고 잘 저울질하여 균형 잡힌 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모름지기 평형을 잃은 저울은 존재 의미가 없다. 권력자는 천칭 저울의 무게중심을 잡기 위한 것과 같은 균형 감각이 매우 중요하다.

집권 중반기에 접어든 대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이 휘두르는 권력, 즉 저울은 이미 균형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 대통령의 우아한 질책 한마디로 검찰 수사의 방향이 정해진 것이 비근한 예다.

권력이 균형을 잃으면 반작용은 반드시 일어난다. 최근 세계 각국의 시위 현장에서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가 활보하고 있다. 400여년 전 인물인 가이 포크스는 ‘권력에 맞선 혁명가’로 2006년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부활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주인공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이후 국제적 해커그룹, 어나니머스(Anonymus)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이제는 누구나 가면을 쓰면 익명의 ‘가이 포크스’가 된다. ‘땅콩 회항’ 사건에서도 익명의 고발자들은 권력자인 재벌 2, 3세의 비행을 잇따라 고발했다.

국민들은 권력자가 균형 잡힌 권력을 발휘하면 순한 양과 같다. 그러나 그 균형추가 무너지면 언제든지 가이 포크스가 될 수 있다. 양들이 항상 침묵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조 전 부사장의 경우에도 이번 기회에 깊이 반성한다면 경영자로서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 역시 문건 파문 등을 포함한 작금의 사태가 권력의 균형추가 무너지고 있다는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2015년 청양의 해에는 청색의 의미처럼 청와대에서 불어오는 새롭고 신선한 바람을 쐬고 싶다.


박성진 디지털뉴스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