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탕에 흰 두개골과 2개의 대퇴골을 교차시킨 검은 해적기 ‘졸리 로저’(Jolly Roger)를 펄럭이며 대양을 누비던 중세의 해적들은 근무조건이 열악했다.
그들은 노략질에 앞서 먼저 비위생적인 환경과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우에 맞서야 했다. 죽음의 문턱은 가까웠다. 잡히면 서양에서는 교수형, 동양에서는 참수형을 당했다.
이들은 정부의 공공연한 지원을 받는 '사략선' 해적과 법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필리버스터'(혹은 버커니어) 해적으로 구분됐다.
사략선은 적선을 나포하는 면허를 가진 일종의 민간 무장선이었다. 영국 여왕의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나 나폴레옹의 해적 로베르 쉬르쿠프 같은 약탈자들은 ‘적 상선 나포 허가증’을 발급받고 항해하다 적선을 탈취했다. 그들의 노획물 일부는 왕실의 몫이었다.
이에 반해 1717년 2월 무역선 위더호를 탈취해 해적 행위를 했던 샘 벨러미는 필리버스터였다. 벨러미의 부하는 150명이었고 이 가운데 30명은 도망친 노예였다.
이들의 의사결정은 원칙적으로 다수결에 따른 민주적 절차를 거쳤다. 이는 1697년 자메이카에서 열린 해적회의에서 의결된 해적 규약에 따른 것이었다. 규약은 노획물의 분배와 해적 일을 못하게 됐을 경우 연금 지급에 관한 규정도 다뤘다. 또 선장은 선원에 의해 선출됐고 투표에 의해 해임이 가능했다.
이 같은 해적들이 18세기 전반에 기승을 부린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1689년부터 1697년까지 영불전쟁, 1701년부터 1713년, 그리고 1714년에는 스페인의 왕위 계승전쟁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그래서 해군 함대는 해적 소탕이 아닌 다른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 전쟁들이 끝나자 함대는 감축됐고 수천 명의 수병은 실업자 신세가 됐고, 해적으로 전직한 자들이 속출했다.
해적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암묵적 수수방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국제 문제가 되고 있는 소말리아 해적들이다.
중세 해적들의 한몫 잡고 은퇴할 수 있는 기회는 하층계급 뱃사람들을 유혹했다. 서로 이익을 나눠 부를 쌓을 수도 있었고 신분 상승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말리아 해적들도 이와 유사하다. 해적은 젊은이들의 인기 직업이 됐고,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단지 범선 대신 모터보트를 타고, 구식 대포와 부싯돌 권총 대신 RPG7·M60·106㎜ 무반동총으로 무장했다는 점이 차이다.
<체포된 소말리아 해적들>
소말리아 12개 군벌이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군벌들이 해적을 직접 운영하거나 납치를 사주하는 것도 중세 해적과 비슷하다. 이들은 납치조 1, 대기조 2 등 보통 3개 조로 활동하고 석방 대금은 필리버스터 해적처럼 3개 조가 균등하게 배분한다고 한다.
그 소말리아 해적이 또 일을 저질렀다. 한국 어선 금미 305호가 지난 9일 케냐 연안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뒤 해적 본거지까지 끌려간 모양이다.
게다가 해적들이 금미 305호를 해적선 모선으로 이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하긴 중세 해적들도 약탈한 무역선을 새로운 해적선으로 삼은 사례가 많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소말리아 해적들이 과거 선배 해적들이 했던 못된 짓을 그대로 답습하나 싶어 걱정이다.
금미 305호의 피랍은 지난 4월 인도양 해상에서 31만9360t급 원유 운반선 삼호드림호가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후 이렇다 할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사건이다.
일각에서는 소말리아에 파병한 청해부대의 화끈한 구출작전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바다의 람보’를 기대하는 것은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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