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키세(KISE)’의 승리였다. 정부는 지난 11일 “제200차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합동위원회에서 한·미 양측은 오염 정화 책임과 주한미군이 현재 사용 중인 기지의 환경관리 강화 방안, SOFA 관련 문서의 개정 가능에 대해 협의를 지속한다는 조건하에 4개 기지 즉시 반환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반환 합의는 이날 즉시 효력을 발휘했다. 이와 함께 용산 미군기지 반환을 위한 협의 절차도 본격적으로 개시됐다.


키세는 미측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논리였다. 키세는 미국이 내세운 반환기지 환경오염 치유기준인 ‘KISE(Known·Imminent·Substantial·Endangerment to Human health)’를 말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간 건강에 대해 알려진·임박한·실질적인·급박한 위험’을 의미한다. 그동안 10년 넘게 한국 측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영향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미국 측은 키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박해 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부는 반환되는 기지들의 환경오염 정화비용으로 추정되는 1100억원을 먼저 우리가 부담한 뒤, 차후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비용 부담과 책임 소재 등을 가리겠다는 입장이다. 미측이 협의를 지속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할진 불투명하다. 미측은 ‘배째라’식으로 10년을 넘게 버텨 문제가 된 기지의 열쇠를 한국 정부에 넘겼다. 이후 협상에서 미측이 정화비용을 부담하리라 여기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말이 좋아 ‘선 환경정화비용 부담, 후 분담금 청구’다. 사실상 안 주겠다고 버티면 그만이다.


키세는 한·미 간 문화 차이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키세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 환경폐기물을 묻을 곳이 많은 미국의 환경오염 치유기준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키세를 반영했다가는 당장 환경단체가 들고 일어날 일이다.


정부는 방위비 분담금 협상 국면에서 미군기지 반환 문제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동시에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 숙원사업을 해결했다는 점을 은근히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미측이 무시하면 그만이다. 지역 숙원사업 해결 차원이라면 10년 넘게 이 문제를 왜 질질 끌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미국은 한국 내 기지 반환 과정에서 비용을 분담할 경우 향후 전 세계 미군기지의 반환 시 적용할 선례가 된다는 점 때문에 환경정화비용 부담에 확실히 선을 그어왔다. 실제 SOFA에 환경조항이 신설된 2003년 이후 미국은 지금까지 80곳의 반환 대상 미군기지 중 54개 기지를 반환하면서 환경정화비용을 단 한 번도 분담한 적이 없다. 미측 입장에서는 기지를 반환하면 이미 협상은 종료된 거나 마찬가지다. 당장 환경단체들은 ‘미군에 면죄부를 줬다’며 반발하고 있다.


용산기지 등 반환되지 않은 나머지 22개 기지 역시 이들 4개 기지처럼 한국 정부의 ‘선 비용 부담·후 협의’로 갈 것이다. 여기서도 미국이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군이 그동안 마구 버린 기름과 중금속 등으로 야기된 오염의 정화비용을 한국이 떠안고 갈 것이라는 말이다. 예상대로 주한미군 보도자료를 보면 오염 정화 관련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미국 의도를 거스르지 않았다. 뒤집어 얘기하자면 문재인 정부의 어떤 주체적인 결정이나 선택도 미국은 용납하지 않았고, 우리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조건부 연장 결정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GSOMIA 종료 선언을 지속하는 역량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GSOMIA 종료 유예를 실용적·전략적 선택을 했다면서 ‘솔모론의 지혜’인 양 포장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정부의) 외교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적절한 카드로 당시 잘 활용됐다”고 평가했다.


GSOMIA는 이번 기회에 그 정체를 여실히 드러냈다. 한·일 양국 간 군사비밀보호협정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행정부와 입법부가 모두 달려들어 GSOMIA 종료를 막았다. 제임스 리시 미 상원 외교위원장은 성명에서 “GSOMIA는 미국의 국가안보와 인도·태평양 지역 평화와 안정에 중요하다”고 밝혔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도 지난달 15일 서울에서 열린 제51차 한·미 안보협의회(SCM) 회의 종료 직후 열린 양국 국방장관 공동기자회견에서 “GSOMIA의 만료로 이득을 보는 곳은 중국과 북한”이라고 말했다. 수년 전 GSOMIA 체결 당시에는 중국은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미국이 궁극적으로 한·미·일 3각 동맹을 만들어 중국을 봉쇄하고자 GSOMIA 체결을 압박했다는 게 확인된 셈이다. 이는 그동안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이 동등한 지위를 지니는 한·미·일 3각관계도 아니고 미국을 정점으로 일본을 중간 파트너로, 그리고 한국을 제일 말단의 하위 파트너로 하는 수직적 동맹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GSOMIA의 조건부 연장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정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정부는 일본의 태도를 보고 종료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럴 거라고 믿기는 어렵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는 지난 9월 말 미 대사관저에서 대한민국 미래혁신포럼 소속 여야 의원 10여명을 만난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좌파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게 사실이냐”라고 물은 것으로 최근 전해졌다. 국방부가 F-35 추가 구매를 시사하는 등 문 대통령이 미국에 우호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좌파’여서 GSOMIA를 종료하려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해석됐다. 상식밖의 무례였다.


한·미동맹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키세나 GSOMIA 유지처럼 압력에 굴복하는 동맹의 미래는 밝지 않다. 동맹은 상호 이익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강화된다. 한·미동맹 자체에 비대칭 성격이 있다고는 하지만, 미국 심기를 건들이지 않기 위해 우리가 심각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동맹이 어떻게 정상적인 동맹이겠는가. 미측에 끌려다니면서도 자주성을 발휘한 것처럼 포장하는 정부도 한심하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Posted by 경향 박성진

댓글을 달아 주세요

ㆍ독특한 위상 배경에…한국 대통령에게 면담 요청도 가능

ㆍ전직 사령관들도 GSOMIA·방위비 분담 등에 발언 쏟아내

ㆍ친미단체·보수언론의 과도한 ‘띄워주기’가 영향력 더 키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21일 청와대에서 한·미 군 고위 관계자들을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하고 있다. 이 간담회는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오른쪽)이 취임 후 문 대통령과의 만남을 요청해 이뤄진 자리로 알려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최근 전·현직 주한미군사령관들의 목소리와 행동들이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 2개월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전작권 전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북핵 등에 대한 진단을 놓고 전 주한미군사령관들의 발언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국내 보수단체들은 이들을 각종 토론회나 세미나 등에 앞다퉈 부르고 있다. 언론인 단체도 가세해 이들에게 한반도 안보 진단 기고를 요청했다. 미 정부가 운영하는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전 주한미군사령관들의 인터뷰 보도를 내보내면서 미국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의 독특한 역할 및 위상, 한국에서 사실상 ‘반 정치인’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분석했다.


■ ‘모자 4개’ 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을 총괄적으로 지휘하는 직책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과 한미연합군사령관, 주한미군 선임장교 등 4개 직위를 겸직하고 있다. 모자를 4개 쓰고 있는 셈이다. 각 사령관 직위에 따라 역할이 제각각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의 주요 임무는 한반도 위기 시나 전시 상황이 닥칠 때 한미연합사령부를 지원하는 일이다. 미 정부가 지정한 인원에 대한 ‘비전투원 소개작전(NEO)’ 지원도 한다. 주한미군사령관은 또 미군과 다국적군에 대한 전시증원(RSO)을 지원한다. 이를 위해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연합사령부가 인도태평양사령부 및 미군의 각 기능별 전투사령부(COCOM), 미 합참, 미국 정부 등과 소통할 수 있도록 통로 역할을 해야 한다.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연합군사령관이기도 하다. 한미연합사령부는 지휘소와 구성군사령관들로 구성돼 있지만, 평시에 상설 전투부대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는 주한미군이 평시에는 한미연합사 소속이 아니라, 유사시에 통제 전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미연합사는 평시 상설부대는 없지만, 연합위임권한(CODA·Combined Delegated Authority) 사항에 의해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CODA는 평시와 한반도 위기 시 초기에만 적용되고, 이후에는 한미연합사령관이 준비된 작전계획에 의거해 전구작전을 지휘하게 된다. 한미연합사령관은 한미군사위원회의 전략지시와 작전지침을 받아 전시에 한미연합군을 지휘하게 된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인도태평양사령관의 소전구 통합군사령관이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사령관은 인도태평양사령관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 한미연합사는 인도태평양사를 통해 주한미군의 지원을 받도록 돼 있다.


현재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은 1978년 한·미 간 합의된 전략지시 1호에 따라 한국군 통수권자인 한국 대통령과 미군 통수권자인 미국 대통령이 합의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지시를 내리면, 이를 한미연합사령관이 행사하게 돼 있다. 전략지시 1호에 의하면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4성 장군인 유엔군사령관을 겸임함으로써만 그 효력이 발생한다고 명시돼 있다. 리언 라포트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과거 한국 정부의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계획에 대해 “나는 주한미군사령관이면서 유엔군사령관이기에 그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이는 유엔군사령관으로서의 작전지휘권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유엔군(UNC)사령관도 겸하고 있어 평시에는 정전협정을 관리하고, 전쟁 발발 시에는 전력 제공국 병력을 협의에 따라 미8군이나 한국군에 배속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또 주한미군 선임장교(SUSMOAK)로서 본인이 겸직하고 있는 한미연합군사령관, 유엔군사령관과의 업무를 조정하는 책임자다. 미 합참의장을 대리한 주한미군 선임장교 자격일 때는 한국군 카운터파트는 한국군 합참의장이다. 동시에 미 국방부 대표 권한을 부여받은 자격일 경우에는 한국 국방장관이 카운터파트다.


주한미군사령관의 업무는 3개 사령관 직위가 엉켜 있는 만큼 미측은 주한미군사와 한미연합사, 유엔군사 등 3개 사령부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겸직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각 사령부 참모직을 겸직하게 함으로써 미측 사령부들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단순화시켜 지휘 및 통제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겠다는 의도에서다. 그런 만큼 한국군으로 전작권이 전환되면 주한미군사령관의 역할과 위상이 한미연합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 등을 겸직했을 때와는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왼쪽)이 지난달 22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의 백선엽 전 육군대장(가운데) 사무실을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백 전 대장의 100세 생일을 축하하면서 ‘영웅’이라고 치켜세워 광복회의 반발을 샀다. 연합뉴스


■ ‘앞다퉈 모시기’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한·미 군 주요 지휘관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진행했다. 사실 이 자리는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이 취임 후 문 대통령과의 만남을 강력하게 요구해서 이뤄진 자리였다는 후문이 정치권에서 나왔다. 주한미군사령관이라는 독특한 위상을 배경으로 할 수 있는 면담 요청이었다.


이런 주한미군사령관에게 광복회는 지난 5일 강력한 항의 공문을 전달했다. 백선엽 ‘전쟁영웅’ 찬양에 대해 사과 및 재발 방지, 면담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광복회는 공문에서 “최근 에이브럼스 사령관을 비롯한 미군 장성들이 독립군 학살에 앞장섰던 반민족행위자 백선엽의 100세 생일을 축하하며, 그를 ‘영웅’이라 치켜세운 점에 대해 우리 국민을 모욕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는 행위로 인식하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광복회는 &lt;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gt;와 &lt;친일인명사전&gt;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하켄크로이츠 깃발 아래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레지스탕스 대원을 학살한 나치 친위대원을 ‘영웅’이라고 찬양하는 행위와 같다”고 지적했다. 이는 지난달 22일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백선엽 장군을 예방하고 주한미군이 페이스북에 사진과 함께 ‘백선엽 장군은 진정한 전사이자 지도자이며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고 한 데 대한 항의였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은 취임 후 갖는 중요한 의전 중 하나가 백선엽 전 육군대장에게 부임 인사를 하는 것이다. 이는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불편하게 보이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는 상처를 주는 장면이라는 게 광복회 입장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이나 주한미8군사령관, 주한미해군사령관, 주한미공군사령관들이 부임하면 의례적으로 언론에 소개되는 행사가 있다. 한국 이름 작명식이다. 박유종(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보우해(마이클 보일 주한미해군사령관), 우기수(케네스 윌스바흐 미7공군사령관) 등 전·현직 주한미군 고위 관계자 수십명에게 한국 이름을 지어준 단체는 한미동맹친선협회다. 회장단이 육군 사단에서 명예사단장으로 위촉되고 지프를 타고 열병식까지 해 물의를 빚었던 바로 그 단체다. 외교부의 설립 허가를 받은 비영리법인인 이 단체가 홈페이지에 소개한 지난 3년간 활동 내역을 보면 주한미군 고위층 한글 이름 지어주기, 미군과 한국군 부대 방문, 미군 지휘관들의 이·취임식 참가, 한·미 군 관계자들과의 리셉션이 대부분이다.


주한미군을 가까이서 수십년 동안 지켜본 ㄱ씨는 주한미군 고위 간부들이 한·미동맹을 내세우는 미군 주변 단체들과의 접촉을 통해 한국민 정서를 일방적으로 읽는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친미단체 주장을 대다수 한국민 정서로 받아들여 잘못된 판단을 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월터 샤프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5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경제연구소(KEI) 주최 방위비 분담금 관련 세미나에서 분담금 인상이 결국 미국산 무기 구입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의소리 방송은 10월24일 ‘유엔군사령부 해체 문제에 관해 일본 정부와의 조율도 필요하다’는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했다.


최근 한·미 간 각종 현안에 편승해 전 주한미군사령관들의 발언이 나오면 국내 언론은 워싱턴 기류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해석까지 붙여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구조다. 이들 중 몇몇은 미국 방위산업체의 로비스트나 자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Posted by 경향 박성진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반도에는 지금 시계 두 개가 ‘최종시간’을 향해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다. 먼저 ‘연장이냐, 파기냐’를 결정해야 하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시계가 오는 24일을 마감으로 시곗바늘을 돌리고 있다. 그 옆에서는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인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배제조치의 시곗바늘이 효력 발생일인 오는 28일을 향해 재깍거리고 있다.


정부는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맞서 GSOMIA 파기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일본이 ‘안보상’ 이유로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는데 ‘안보협력국’을 전제로 한 GSOMIA 유지는 상호모순이기 때문이다. 반면 GSOMIA 파기는 한·일관계뿐 아니라 한·미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도 크다. 일부에서는 한·미·일 안보협력 틀을 유지하면서 일본에 대한 대응조치도 되는 방안으로 GSOMIA를 연장하되 ‘정보 공유의 일시중단’을 선언하는 것을 제시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처럼 여러 입장이 있지만, 이제는 정부가 ‘GSOMIA 조건부 파기’를 하루라도 빨리 선언해야 할 때이다. 오는 24일까지 일본 정부가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GSOMIA는 파기될 수밖에 없다고 발표해야 한다.


한국은 GSOMIA를 파기해도 한·미·일 정보보호약정(TISA)을 활용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 측이 GSOMIA를 파기하면 미·일도 TISA를 통한 정보 제공을 거부할 수 있고, 한·미동맹이나 한·미·일 안보협력 틀이 무너진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GSOMIA는 한·미·일 안보협력 사안의 전략적 옵션 중 하나일 뿐, 전부가 아니다. GSOMIA는 2016년 한국이 탄핵정국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미국이 강요한 협정이다. 당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9%가 GSOMIA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GSOMIA는 표면적으로 북한에 대한 대응 차원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 견제를 위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은 GSOMIA 체결을 압박한 당사자인 만큼 ‘결자해지’ 차원에서 GSOMIA 유지를 위해 일본 정부에 압박을 가해야 하는 게 도리다. 


세부적으로 보면 GSOMIA는 호혜적 정보 교환이지만, 현재는 일본에 매우 유리하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대한 대응은 조기경보가 핵심임을 감안하면 한국이 제공하는 정보가 일본 안보에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GSOMIA가 파기되면 일본의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한 조기경보 시스템 구축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많은 외교 전문가들은 GSOMIA를 파기하면 한국이 미국의 외교적 지원을 받아내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미국의 동북아 핵심전략은 더욱 친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이는 GSOMIA가 한·미·일 관계의 핵심이며, 미국은 한·미동맹보다 미·일동맹을 더 중요시한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즉 GSOMIA를 파기하면 한·미동맹이 약화된다는 이들의 주장은, 한국은 미·일동맹의 종속변수 정도임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거나 마찬가지다.


현재 한·미·일 관계는 상당한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이 추구하는 한·미·일 안보구조는 동등한 대칭적인 것이 아니라, 한·일관계를 미·일관계 밑에 두는 계선적인 하부구조로 만들려 한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수직적 한·미·일 계선구도 속에서 GSOMIA가 한국의 전략적 역할과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파기하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미국은 일본의 경제침략 도발을 묵인하고 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지난 12일 지난달 방미에 대해 “우리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미국이 한·미·일 공조를 더 중요시하는지, 재무장한 일본을 위주로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을 종속변수로 아시아 외교정책을 운용하려 하는지를 파악하려 했던 것”이라며 “미국이 한·미·일 공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관여를 할 것이고, 무장한 일본 위주로 아시아 외교정책을 하겠다고 하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차장의 말대로 미국이 한·미·일 안보관계보다 일본의 재무장을 더 중요하게 판단한다면, GSOMIA 파기를 무시할 것이다. 반면 한·미·일 3각관계를 중요시한다면 일본이 경제도발을 중지하도록 나설 것이다. 특히 미국이 만일 일본과 경제도발을 협의하지 않았다면, 동북아 안보질서를 한·미·일 구도로 가져가기 위한 첫걸음인 GSOMIA의 파기 상황을 그대로 지켜볼 수는 없을 것이다.


‘GSOMIA 카드’는 미국에 한·미·일 안보체제를 유지하려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침략을 중지시키란 궁색한 요구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이다. 미국은 3국 안보체제 유지를 위해서라도 한·일 간 경제전쟁에 개입해 더 이상 피해를 확산시키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 정부는 GSOMIA 파기를 통해서라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조치 중단을 시도해야 한다. 상대방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카드를 사용조차 못한다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GSOMIA 파기 선언은 일본이 지난달 각의 결정을 하기 전에 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일이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 효과는 반감되기 때문이다. GSOMIA 파기는 또 박근혜 정부 이전으로 한·일관계를 복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동맹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은 상호 신뢰다. 일방적 요구나 양보는 신뢰 상실로 이어진다. 한·미동맹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지나치면 지나치다고 이야기해야 동맹이 강화된다. 한·일 간 생존적인 경제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미국 심기를 건드릴까 우려해 GSOMIA 파기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나라는 비정상 국가다.


설사 정부의 GSOMIA 파기 선언에도 불구하고 미·일이 아무런 행동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한·미동맹이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의 의미가 나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방위비 분담금 6조원을 준다 하더라도 한·미동맹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현실에 눈뜨게 될 것이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Posted by 경향 박성진

댓글을 달아 주세요

MB 때 ‘밀실 협상’ 논란으로 무산됐다가 2016년 박근혜 정부 때 속전속결로 체결

미국이 ‘중국 견제’ 의도로 한·일에 체결 압박…북 미사일 방어 등 3각 공조의 핵

일본이 정보자산 더 강하지만 파기 땐 한국보다 손해 크다는 미 의회 보고서도 나와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11월23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오른쪽)과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에 서명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한국 제외 결정으로 격화된 한·일 갈등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 여부가 최대 분기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정부가 1년마다 자동 연장되는 GSOMIA를 파기하려면 협정 만료 90일 전인 이달 24일까지 서면으로 상대국에 통보해야 한다.


정경두 국방장관은 5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GSOMIA 체결 후 일본과 공유한 군사기밀은 올해 3건을 포함해 총 26건이라고 밝혔다. 그는 GSOMIA 파기 가능성에 대해 “GSOMIA 자체 효용성보다, 여러 안보와 관련된 우호 동맹국(미국) 간 관계가 복합적으로 있어 매우 신중하게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군 내부에서는 협정시한을 넘겨 파기를 선언해도 파기 효력은 내년 11월 이후부터 발생하지만, 파기 선언 직후부터 한·일 군사정보 교환을 실질적으로 중단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 ‘아베의 꼼수’


당초 정부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방침이 GSOMIA 연장 여부를 마지막으로 결정하기 이틀 전인 오는 22일쯤 시행될 것으로 예측했다. 일본 내부 의사결정 절차를 감안한 결과였다. 그러나 일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4박5일 휴가를 빌미로 각의 의결을 5일이나 미루는 ‘꼼수’를 부렸다. 그 바람에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 시행 날짜도 28일로 정해졌다. 한국 정부가 GSOMIA를 파기하려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시행 전인 24일 이전에 먼저 결정해야만 한다. 이 경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GSOMIA를 폐기하자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시행이 강행되는 것처럼 비치는 등 한국 정부로서는 그만큼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한·일 GSOMIA는 논의 초창기부터 시끄러웠다. 한·일 양국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6월 GSOMIA 체결 직전까지 갔지만, ‘밀실협상’ 논란이 불거져 막판 무산됐다. 박근혜 정부 때는 최순실 국정개입 파문에 여론의 관심이 쏠린 틈을 타 군사작전하듯 2016년 11월23일 체결했다. 당시 한민구 국방장관과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의 GSOMIA 서명식 장면도 비공개로 해 ‘졸속’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문제는 2012년 문건과 다를 바 없는 전문과 21개 조문으로 구성된 2016년 한·일 GSOMIA는 양국 정보당국이 기밀을 공유하는 선에서만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협력체제를 구축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는 점이다. 군사정보뿐만 아니라 군사정보시설까지 개방할 수 있도록 했고, 제16조에서는 상대국 군사기밀을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자국 국민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정보당국 간 서면동의로 협정을 언제든지 개정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양국 간 군사협력을 훨씬 더 강화하는 쪽으로 협정이 개정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이는 미국을 제외한 한국의 군사협력으로는 최고 수준이다. 정부는 GSOMIA 체결 후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을 체결하는 로드맵까지 추진하다 중단된 상태다.


박근혜 정부가 GSOMIA 서명식을 비공개로 하자 사진기자들이 바닥에 카메라를 놓고 취재거부를 하며 항의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한·미·일 체제


미국 정부가 협정 체결을 압박한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로, ‘속전속결’식 한·일 GSOMIA의 진행은 한·미·일 3각 안보 공조를 압박한 ‘미국 변수’에 따른 결과였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예비역 장성 ㄱ씨는 “미국이 GSOMIA를 통한 한·일 안보협력을 원하는 것은 한·미·일의 북한 위협 대응뿐만 아니라 중국 견제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한·미 동맹의 군사적 부담 상당 부분을 일본에 맡기겠다는 미국 의도도 반영됐다.


전직 국방부 고위 관계자 ㄴ씨는 “미국은 장기적으로 한·미·일 미사일방어를 위한 공동의 교전수칙과 작전계획까지 공유하려는 복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미 한·미·일은 미사일방어 공동훈련을 연례 행사로 하고 있다. 한·미·일 미사일방어 네트워크에는 위성 정보, 레이더 정보 등의 공유가 필수적이다.


GSOMIA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 간의 군사비밀정보의 보호에 관한 협정’이다. 당사국 간 군사정보의 비밀등급 분류, 보호원칙, 정보 열람권자 범위, 정보 전달과 파기 방법, 분실·훼손 시 대책, 분쟁해결 원칙 등을 담고 있다. 당사국들은 이 협정을 안전판으로 2급 이상 정보를 교환한다. 정부는 현재 일본을 포함한 21개국과 GSOMIA 협정을 맺고 있다. 이외에 13개국 및 1개 국제기구(NATO)와 군사기밀정보 보호에 관한 약정을 맺고 있다. 협정은 국내법 효력을 갖고 있으나, 약정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GSOMIA 파기는 ‘일본의 손해’다. 상당수 군사 전문가들은 GSOMIA로 일본이 제공할 수 있는 고급 대북 정보가 더 많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많은 정보수집 위성 6기와 탄도미사일 탐지 이지스함 6척, 탐지거리 1000㎞ 이상 지상 레이더 4기, 공중조기경보기 17대, P-3와 P-1 등 해상초계기 110여대 등 다양한 정보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점을 근거로 내놓고 있다. 북한이 동해상으로 발사하는 미사일도 먼 동해상의 정확한 낙하지점 포착에는 일본 협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본의 정보능력은 한반도 전구에서는 유용성이 떨어진다. 북한 미사일이 동쪽이 아닌 한반도 남쪽으로 날아오는 경우에는 한국 정보자산으로 100% 잡아낼 수 있고, 일본 정보자산은 차후 분석 과정에 도움이 되는 정도기 때문이다.


■ 일본이 요구한 GSOMIA


원래 GSOMIA는 정보자산이 부족한 한국군이 1989년부터 먼저 일본에 제의했다. 이에 대해 한국군 정보능력을 얕잡아 본 일본은 소극적이었다. 이후 한국군이 이지스 레이더 등 탐지자산을 확충하고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가 잦아지자 일본은 2010년부터 GSOMIA 체결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국내 정서로 2012년 체결이 무산되자 한·미·일 미사일 공조체계 구축이 급한 미국은 2014년 말 3국 정보공유 약정을 체결했다. 이후 한·일 양국은 이를 토대로 미국을 매개로 해 간접적으로 북핵과 미사일 군사정보를 공유했다. 한국군으로서는 미국을 경유한 북핵·미사일 정보가 적시성 면에서 제한이 있었을 뿐 큰 불편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2016년 한·미·일 안보협력을 내세워 한·일 GSOMIA를 관철시켰다. 한민구 전 국방장관은 당시 GSOMIA 체결 이유로 킬체인(Kill Chain)과 한국형미사일방어(KAMD), 대량응징보복(KMPR)을 내세웠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2013년 발간한 보고서는 “기술적 측면에서 한국은 지리적으로 근접한 북한에서 미사일이 수분 내에 저고도로 날아오기 때문에 한·미·일 3국 미사일방어 공조에서 이득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국의 이지스함이나 백두(신호)·금강(영상) 정찰기가 수집한 감청·영상 정보(SIGINT·시긴트) 등에서 잡아낸 북한 미사일 움직임은 일본 측에 시간적 여유를 주기 때문에 요격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점에서 일본 측에 훨씬 이득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게다가 한국은 올해 고고도 무인정찰기 글로벌호크 4대를 도입한다. 일본은 절대 확보할 수 없는 고해상도 북한 지상 영상 정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일본의 정보력은 미국의 종합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GSOMIA를 통해 한·일 군사정보를 묶으려 한 목적은 한·미·일 3각 안보동맹으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비롯됐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 정부는 GSOMIA 파기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우리에게 GSOMIA를 강요했던 미국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안보를 내세워 경제도발을 한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라는 압력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GSOMIA 파기는 단순한 한·일 간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영향력 쇠태(衰態)로 해석되면서 동북아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긴다는 의미다. 미국으로서는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온 동북아 및 태평양 전략의 핵심적 기반이 훼손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미국이 주도한 한·일 GSOMIA를 한국 정부가 먼저 파기할 경우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 균열에 대한 책임을 놓고 한·미·일이 낯을 붉힐 수도 있게 됐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Posted by 경향 박성진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