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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기자수첩

'사후약방문' 보여주기 무력시위는 이제 그만



영국 경제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FT)에 흥미로운 글이 실렸다. 러시아 출신 북한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의 글이다.

란코프 교수는 ‘북한이 반드시, 머지 않아 도발할 이유’라는 글에서 “한국은 이번 포격훈련 이후 다소 호전적이고 자축하는 분위기”라며 “북한이 한국의 단호한 태도와 군사력 사용 의지 앞에서 주춤했다는 것이 서울의 주된 여론”이라고 전했다.

란코프 교소는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북한은 무서워서 대응을 못한 게 아니라 냉철한 전술적 면모를 보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은 자신이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공격한다. 불리한 싸움은 피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라고 분석했다.

국방부를 10여년간 출입하면서 북한의 도발을 여러차례 취재한 경험으로 볼 때 란코프 교수의 의견에 동의한다.

북한은 나름대로 전략적, 또는 전술적 판단으로 연평도 사격훈련에 대한 보복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특유의 ‘살라미 전술’‘치고 빠지기 전술' 차원에서 더 이상 군사적으로 붙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북측이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나선 남측의 무력 시위에 겁을 먹고 꼬리를 내린 것처럼 홍보하고 있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우리군의 확고한 서북도서 방어 및 영토주권 수호 의지를 보인 것이 훈련성과였다”며 “중·러 등 요청과 북한의 위협적 언동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고 일관된 군사적 조치로 국민 안보 불안감을 해소하고 일체감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연평도 사격훈련 이후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청와대와 여당을 중심으로는 자축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게다가 군의 잇따른 훈련을 통해 무력과시를 즐기는 분위기다.(보수층의 표를 다지는 데는 매우 효과적인 이벤트다)

군은 연평 사격훈련의 여세를 몰아 130㎜ 다연장로켓포와 K1 전차, K-9 자주포, F-15K, KF-16 등을 동원한 최대 규모의 공·지합동훈련을 실시한다. 도하 언론에도 전차와 자주포, 다연장로켓포가 불을 뿜는 화력시범을 대대적으로 공개한다.(대대급 훈련으로 예정됐던 것이 연평도 사격훈련 이후 갑작스럽게 규모가 크게 커진 것이다)

또 동해 바다에서는 구축함과 잠수함을 동원한 해상 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다음주에는 서해 바다에서도 해상훈련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굳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한반도 긴장을 조성하지 않더라도 조용히 북한을 압박하면서 효과적으로 훈련을 실시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군 당국은 최근의 무력 시위성 훈련을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공·지합동훈련에는 취재진을 위한 헬기까지 이례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지금 한반도 전체는 북한을 향한 무력과시의 장이 돼버린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같은 무력과시에 겁먹어 북한이 앞으로 도발을 하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얻기 위해서는 ‘틈새’를 노려 반드시 도발한다. 이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번 연평 도발이 그것을 증명했다. 앞서 군당국은 천안함 사건 이후에도 미 항모까지 참가하는 한미연합 무력 시위훈련을 대규모로 실시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연평도 포격 도발이 발생했다)
 
국방장관도 국회 국방위에서 북한의 ‘성동격서’식 도발을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북한군은 전면전까지 가지 않을 정도로 ‘히트 앤드 런’ 작전을 구사하는 게 특기다)

그런면에서 우리 군은 ‘사후약방문’식 처방에 매달린다는 느낌이다. 지난 20일 실시한 연평도 해상사격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부는 사격훈련을 통해 단호한 의지로 북한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보여 군의 사기와 국민적 신뢰를 높였다고 여기고 있다.

또 전 세계에 북방한계선(NLL) 수호 의지를 크게 과시했다.(대신 NLL이 국제분쟁수역임을 홍보하려는 북한의 의도에도 말려들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무엇이 바뀌었나. 연평도에서 전사한 해병 용사 2명과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 2명의 복수를 공언한대로 ‘천배 만배’ 되갚아준 것도 아니다.

냉정하게 말해 사격훈련으로 ‘때린 놈’에게 피해를 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때린 놈’인 북한은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고 말한다.(게다가 주목을 받은 K-9 자주포는 12문을 배치해 놓고도 4발 쏜 것이 전부다. 지난번 훈련 때는 60발을 쐈다)

어찌보면 무척이나 약올리는 발언이다. 마치 개인간 싸움에서 두들겨 맞은 후 상대방을 때리지도 못하고 눈앞에서 ‘쇠파이프’만 휘두르다 만 꼴이다. 그리고 ‘때린 놈’은 피해자가 쇠파이프를 휘둘렀어도 맞지 않았으니 그냥 무시해버리겠다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예비역 장성이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사격훈련 한번 하고 북한이 저지른 도발을 응징한 것처럼 착각하는 정치권과 언론 보도에 대한 불만을 쏟아 냈다)

청와대 고위 관리가 말했듯이 북한은 우리 군의 사격훈련에 대응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자칫 어설픈 대응을 했다가 전면전으로 갈 경우 김정일 정권의 몰락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군 고위 관계자는 “(한반도에서) 전면전에 이르려면 전면전 하기 위한 징후가 나타난다”며 “그렇기에 연평도의 국지도발 가지고는 전면전으로 이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이런 분위기라면 앞으로도 연평도에 배치된 대대급 부대의 해상 사격훈련을 할 때마다 전략부대인 유도탄사령부(9715부대)까지 포함한 육·해·공 제병합동전력과 주한미군까지 나서는 상황을 반복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연평도 포격이 그랬듯이, 도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예측 불가능한 시점을 택해 도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북의 행태로 봐서 우리가 취약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도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우려스러운 것은 북한의 도발은 군사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의 지하철에서 ‘가스 테러’를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슬그머니 전염병 세균을 퍼뜨리지 않으리란 확신도 없다. 군 안팎에서도 이를 우려하는 전문가들이 많다.(이경우 행위자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구체적인 군사 도발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의 소행이라는 증거를 잡기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결국 군의 잇따른 무력과시 차원의 훈련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언제라도 추가 도발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 국민들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군도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정부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표심을 결집하기 위한 전시행정 차원의 보여주기식 무력 시위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이 정부가 진정으로 해야 할 역할이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사후약방문’ 처방은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