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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이야기

국방백서에 ‘적’ 표기하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정부가 2년마다 발간하는 국방백서에서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을 남북관계 변화에 따라 삭제 또는 수정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자 해묵은 ‘주적 논란’이 반복되고 있다. 국방백서의 ‘(주)적’ 표현은 20년 넘게 국민 여론을 편가르기 시켜온 단골 프레임이다.

 

2016년 국방백서

 

국방백서는 군사적 위협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시대 상황과 남북관계를 반영해 왔다. 그런면에서 4·27 판문점 선언 이후 올 연말 발간 예정인 2018 국방백서에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이 어느정도 순화될 것이라는 관측은 예견된 사안이었다. 판문점 선언에서 상호 약속한 ‘일체의 적대행위 전면중지’에 따라 남북 모두 군사적 상황에서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나온 예측이었다. 이후 막상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자 보수 야당·언론은 군의 정신전력 와해로 간주하고 비판 강도를 높이고 있다. 논란이 깊어지자 송영무 국방장관은 국방백서를 발간하지 않을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국방백서란

 

국방백서(White Paper)나 국방보고서(Annual Report)는 국민을 상대로 국방정책을 지지하도록 유도하고, 예산 확보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정부가 출판하는 간행물이다. 포괄적인 국방 정보자료와 전략지침을 제공하는 것도 주요 발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같은 정보 제공은 자국의 국방력이 안보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는 차원이기에 굳이 백서에서 특정 국가를 타도 대상인 적으로 명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게 현 정부의 시각이다. 나아가 ‘(잠재적) 위협’ 정도의 표현 자체가 언제든지 ‘적’이 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수사적 표현이고, 국방백서 문구 변화를 장병들의 정신전력 와해로 직결시키는 것은 오히려 장병들의 수준을 무시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국방백서가 국민 지지를 전제로 하는 만큼 발행 국가는 대부분 자유주의 나라들이다. 사회주의 국가는 국방백서에 언급할 수 있는 내용 자체를 국가안보개념으로 분류해 비공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군사굴기’를 앞세운 중국이 대폭적인 국방예산 증액을 하면서 국민지지와 주변국 경계심 완화를 목적으로 ‘중국적 국방’이라는 백서를 부정기적으로 발간하고 있다. 중국은 백서에서 평화적 발전 노선, 방어적 국방정책 고수와 군사적 상호신뢰 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국방백서를 매년 발행하는 국가는 일본과 인도 정도로 많지 않다. 한국과 대만은 격년제로 내놓고 있다. 중국과 독일,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등은 부정기 발간하고 있다. 미국은 ‘국가군사전략’과 ‘국가국방전략’이라는 이름으로 4년마다 국방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북한은 국방백서는 물론 군사적 실태에 대한 보고서 형태 문서를 일절 발간하지 않고 있다.

 

■‘주적의 탄생’

 

국방백서에 ‘주적’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95년 발간판이었다. 이는 1994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문제를 놓고 남북이 특사 교환 실무접촉을 시작했을 때 박영수 북한 대표가 ‘서울 불바다’라는 협박성 발언을 한데서 비롯됐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보수층으로부터 이에 대한 맞불 대응을 종용받았고, 마땅한 방안이 없어 고육책으로 내놓은 것이 국방백서의 주적 개념이었다. 1995년 국방백서 국방목표 해설 부분에는 “북한을 주적으로 상정하면서···”라는 과거 군사정권에서조차 거론하지 않았던 표현이 새로 등장했다.

 

이후부터 ‘북한=주적’이나 ‘북한군=적’ 표현은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하나의 프레임으로 자리잡았다. 김대중 정부는 첫 남북정상회담 이후 보수 언론 등의 시비를 차단하려고 2001년부터 ‘01~’03년 국방백서 발간을 중단하고, 정책자료집으로 대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보수 언론은 정책자료집 발간이 ‘주적’ 표현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주적 논란을 정치·사회 쟁점화했다. ‘(주)적 논란’은 지난해 대선 토론과정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해 ‘팩트 체크’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보수 야당·언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2004년 국방백서에서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 대량살상무기, 군사력 전방배치 등은 직접적 군사위협’으로 표기해 발간했다. 이후 북한이 1차 핵실험을 실시하자 2006년 국방백서에는 북한을 ‘우리 안보의 심각한 위협’으로 기술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인 2008년 국방백서에도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증강, 군사력 전방배치 등은 우리 안보에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라고 명시했을 뿐, ‘적’이라는 표현은 없었다. ‘적’ 표현이 다시 등장한 계기는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이었다. 이후 발간된 2010년 국방백서는 ‘이러한 위협이 지속되는 한, 그 수행주체인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으로 표현했다. 이는 가장 최근 나온 2016년 국방백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이 지속되는 한’이라는 전제를 달아 남북 대치상황 변화에 따라 표현을 달리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았다.

 

■외국 사례

 

전 세계적으로 국방백서나 국방보고서, 또는 이와 유사한 공식문서에 ‘(주)적’ 표기 사례는 없다.

 

1980년대까지는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대상 국가 자체를 직접 거론하며 ‘○○국은 위협’이나 ‘○○국은 잠재적 위협’으로 표현했다. 서독이 1985년 국방백서에서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 일본이 1987년 방위백서에서 ‘극동 소련군은 잠재적 위협’으로 기술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모든 국가가 국방백서에서 상대 국가를 직설적으로 지칭하는 대신 구체적 사안과 행위를 들어 ‘(잠재적) 위협’을 기술하고 있다.

 

가령, 미국은 2018년 ‘국가국방전략’에서 ‘중·러는 수정주의 세력으로 최우선 위협’ ‘북한·이란은 불량정권으로 지속적 위협으로 평가’라고 하면서 ‘수정주의’와 ‘불량’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중국도 가장 최근 발간한 2015년 ‘중국적 국방’에서 ‘대만독립 분열세력과 분열활동은 양안관계의 평화적 발전에 최대 위협’으로 기술했을 뿐 대만 자체를 위협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일본 역시 2017년 방위 백서에서 ‘북한의 핵무기, 탄도미사일 개발은 절박한 위협’ ‘중국의 현상변경 시도는 지역·국제안보에 심각한 불안요소’로 평가했다. 북한과 중국 정권이나 군부 자체를 위협으로 규정하지 않고 행위와 현상에 주목한 것이다.

 

국내외 관광객들이 26일 개성공단 등을 볼 수 있는 경기 파주시 비무장지대(DMZ) 내 도라전망대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파주 _ UPI연합뉴스

 

■고심하는 국방부

 

국방부는 26일 국방백서에서의 ‘북한군=적’ 문구 삭제를 놓고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밝혔다. 군 안팎에서는 상호주의와 비례성 원칙에 따라 북한의 비핵화 작업과 속도를 지켜보면서 국방백서의 표현을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과 남북 정상의 판문점 선언을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북한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간주하는 문구를 전향적으로 삭제해야 한다는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송영무 국방장관은 지난 24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주적 개념을 놓고 설전을 벌였다. 송 장관은 “(국방부) 실무진에게 (국방백서의) 주적 개념에 관해 지시한 적이 없다”며 “영토·영해·영공을 침범 위해하거나 국민의 재산 생명을 위협하는 건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백서의 관련 표현 삭제 여부는) 학자 등 여러 사람 얘기를 듣고 최종 결심을 (연말에) 발간하든지, 아예 발간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적이라 하더라도 이를 공개 문서에서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별개 문제라는 평가가 많다. 상호 신뢰를 구축해야 할 상대방을 ‘적’으로 공언한다면 앞으로도 대화하지 말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전국적 범위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 완수’라는 문구를 담고 있는 헌법적 성격의 북한 노동당 규약과 대외 군사외교에도 참고자료가 되는 국방백서를 비교하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