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애국가보다 더 많이 들었던 노래가 있다. 바로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다. 어릴 적 동네 쓰레기차가 이동할 때마다 이 새마을 노래를 줄기차게 틀었다. 게다가 아침마다 등굣길에 지나야 하는 동사무소 스피커에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마을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다 보니 어린아이에게 새마을 노래는 좋든 싫든 들어야 하는 곡이 되었고, 일종의 ‘브레인 워싱’, 즉 세뇌곡이었다. 나이 50이 훌쩍 넘은 지금도 새마을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줄 아는 몇 안되는 곡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제 버스로 출퇴근하는 나에게 ‘제2의 새마을 노래’가 생겼다. 버스를 탈 때마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음성광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 버스 음성광고 역시 ‘브레인 워싱’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나이 80이 넘어 치매가 오더라도 간호사 앞에서 “OOO 가슴 성형으로 유명한 XXX 성형외과”를 읊조리지 않을까 싶다.

버스 승객의 졸린 귀를 뚫기 위해 반복되는 하이 톤의 음성광고는 정확히 12초 동안 떠들어댄다. 새벽 첫차부터 막차까지 정해진 정류소만 나타나면 차내 스피커에서 울려 퍼진다. 성형외과 음성광고뿐만 아니라 안경점, 학원, 기업, 음식점 등 다양하다. 이 가운데 성형외과의 자극적인 멘트는 반복 효과가 다른 업종보다 탁월하다. 또 자주 듣다보면 음성광고에서 언급하고 있는 학원이나 음식점을 한 번쯤은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기도 하지만, 공포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각종 현대병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버스 승객에게 특정 질환에 대한 언급을 반복하면서 병원을 찾도록 유도하는 멘트가 나오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면 클래식 음악으로 하루 일과에 지친 승객의 심성을 달래주는 고마운 운전기사를 만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렇지만 이 버스도 특정 정류장에서는 여지없이 ‘XXX 성형외과’ 광고 멘트가 나온다.

성형외과 광고를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면 성형수술을 간단한 미용 시술 정도로 인식하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게 심리학자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신체 위험이 따를 수 있는 의료적 수술을 ‘미용적 시술’로 가볍게 여기게 만들도록 한다는 것이다.


성형외과 간판과 버스 광고(출처 :경향DB)


최근 성형수술 중 일어난 사고로 시끄러운 한 성형외과도 닥치는 대로 광고를 해 댄 곳이다. 만약 한 버스 승객이 음성광고를 듣고 성형외과를 찾았다가 의료사고를 당했다면 서울시도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 서울시 역시 미용 성형수술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이나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무절제한 광고를 규제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형외과 광고뿐만이 아니다. 왜 버스 승객들은 본인이 동의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음성광고를 들어야 하는가. 이는 문자광고와는 분명히 다르다. 문자의 경우는 본인이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음성은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선택적 노출이 불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서민들의 귀를 괴롭히는 음성광고의 폐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솔직히 버스에서 ‘소리지르듯’ 빠른 속도로 질러대는 광고음성보다는 은은히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음악이 서민들의 정서를 순화해준다고 믿고 있어서였다.

서울시 설명에 따르면 대다수 버스 승객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그 음성광고라는 게 ‘시내버스 정류소 자동안내 방송기기를 무상으로 공급’하는 조건으로 하는 거란다. 게다가 버스 음성광고는 민간단체인 버스조합과 광고업체 간 계약이란다. 이런 음성광고라도 있어서 버스요금 인상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게 서울시 간부의 설명이었다.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을 애용하는 서민들의 정서를 짜증스럽게 만드는 대가치고는 참으로 옹색했다.

그렇다면 아예 서울시 공용버스나 간부들의 승용차에서도 음성광고를 틀어주는 것은 어떤가. 서울시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광고이니만큼 광고료도 좀 비싸게 받아 이 돈을 서울 시내버스 운용비에 보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음성광고를 듣고 여성분들의 가슴을 고치든지 말든지 하는 것은 서울시 간부 여러분이 알아서 할 일이겠다. 오는 6·4 지방선거에서 버스 음성광고를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후보에게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한 표 찍겠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거창한 데 있는 게 아니라 사소한 변화에서 자랄 수 있다고 믿고 있어서다.


박성진 전국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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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향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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