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육·해군 이어 1949년 10월1일 공군이 가장 늦게 창설…

ㆍ육·해·공 ‘3군 체제 완성의 날’ 통합 기념일로 제정

ㆍ‘38선 돌파 날짜서 유래’ 주장엔 군 “공식입장 아니다”…

ㆍ문 정부 들어 “광복군 창설한 9월17일로 바꾸자” 잇따라


영국 종군기자 존 매켄지가 1907년경 촬영한 구한말 의병들(위 사진)과 1940년 9월17일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후 한·중 대표들이 기념촬영하는 모습(아래). 국군의 뿌리를 의병과 광복군에서 찾아야 한다며 국군의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71주년 국군의날 행사가 1일 대구 공군기지에서 거행된다. 창군 이래 최초로 공군전투비행단에서 열린다. 대구 기지는 F-15K 전투기를 운용하는 11전투비행단과 공중전투사령부, 군수사령부가 있는 대한민국 영공 방어의 핵심 작전기지다.


■ ‘국군의날’ 논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현행 국군의날을 10월1일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 등 다른 날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은 지난 4월 국군의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바꾸고 국경일로 격상하자는 국경일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지난해에도 국군의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바꾸자며 민주당 권칠승 의원이 대표 발의했고, 문희상·민병두·박광온·이해찬 의원, 민주평화당 조배숙 의원 등 32명이 결의안에 서명했다. 국군의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바꾸자고 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앞서 16대 국회 때인 2003년, 17대 때인 2006년에도 각각 ‘국군의날 기념일 변경 촉구 결의안’이 발의됐으나,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한국광복군동지회에서는 그동안 “한국광복군이 우리 민족의 군대로서 의병과 독립군의 전통을 이어 성립된 맥으로 보나, 우리나라 헌법정신에 입각한 정부 법통 계승 차원에서 보더라도 대한민국 국군의 원류임이 분명하다”며 “한국광복군 창군일인 9월17일로 (국군의날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국군의날 변경에 대해 자유한국당 등 보수 야권에서는 “독립세력과 건국세력 편가르기”라며 반대하고 있다.


■ ‘10월1일’은 왜


10월1일 국군의날은 1956년 9월21일 대통령령 1173호에 의해 제정됐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육군 제3사단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날을 기념해 국군의날로 정했다는 주장은 군 당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국회 제출 자료 등에 따르면 10월1일을 국군의날로 정한 것은 창군 이후 각 군별로 창설기념일을 정해 시행해 오던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제일 마지막으로 출범한 공군 창립일이 1949년 10월1일로, 한국군이 육·해·공군 3군 체제를 완성하게 됐기에 그 날에 맞춰 국군의날을 의결했다는 것이다. 이후 육·해·공군 기념일은 국군 전체 통합 기념일로 단일화됐다.


국군의날을 확정한 당시 국무회의 심의경과표를 보면 국군의날 제안 이유와 제정 배경에 대해 ‘3군 단일화와 국군의 사기, 그리고 국민의 국방사상 함양에 바탕을 두고 재정 및 시간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육군의 38선 돌파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다. 국방부 역시 국군의날이 38선 돌파일이라는 주장에 대해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날은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날이기도 하다.


국군의날이 정해지기 전까지 육군은 1946년 1월15일 미군정 아래서 남조선국방경비대 1연대가 창설된 날을, 해군은 1945년 11월11일 조선해안경비대의 모체가 된 해방병단의 창설일을, 공군은 1949년 10월1일 육군에서 분리된 날을, 해병대는 1949년 4월15일 부대 창설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국군의날이 논란이 된 이유는 육군 3사단 23연대 3대대가 38선을 돌파한 1950년 10월1일을 기념하는 것이 국군의날 지정의 배경이 됐다는 주장 때문이다. 육군은 1955년 ‘육군의날’을 당초 국방경비대 창설일에서 유엔군이 ‘작전명령 제2호’로 38선 돌파를 공식 승인한 10월2일로 변경했다. 이후 육군 3사단이 38선 위로 진격한 날짜가 10월1일이라는 게 확인되자 정부가 국군의날을 공군 창설일과 겹치는 10월1일로 정했다는 게 육군의 일반적 시각이다.


■ ‘9월17일’·‘8월1일’


1940년 9월17일은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기념일이다. 광복군은 1940년 9월17일 중국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서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한국광복군 선언문)으로 내걸고 창설됐다.


광복군은 광복 전까지 중국군사위원회에서 파견된 군인들과 함께 공동 항일전선을 구축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의 심장부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장제스의 중국군사위에 예속돼 활동했다. 주요 부서 간부직에도 중국군을 두고 있었다. ‘5성 장군’으로 유명한 김홍일 장군(1898~1980)이 중국군 제19사단장 대리와 광복군 참모장으로 장제스의 중국군과 광복군을 넘나들며 일본과 싸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중국군에서 중장(한국군 2성 장군급), 한국군에서 중장(3성 장군)을 역임해 ‘5성 장군’으로 불렸다.


이런 배경에서 국군 군번 1호인 이형근 예비역 대장은 “광복군은 망명군으로서 정식 군대로 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일본 육사 56기 출신인 그는 “조선경비대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며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일인 1946년 1월15일을 국군의날로 정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군 해산일인 8월1일이 국군의날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재향군인회가 1993년 8월 펴낸 ‘광복군전사와 국군의 맥’은 국군의 정통성이 의병에서 이어져 온다고 분석했다.


대한제국군은 을사늑약 이후 1907년 8월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1940년 9월 광복군을 재조직할 때 기록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보고서’를 보면 ‘정미년(1907년) 8월1일 국방군(대한제국군) 해산의 날이 곧 광복군이 창립된 날이라 할 것이다’라면서 일제에 선전포고한 날로 규정했다. 이 정신이 이후 의병과 독립군, 광복군, 국군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광복군 역사의 정통성은 독립군인 셈이고, 한국군의 뿌리는 항일 의병에 있다는 의미다.


경기 평택시 해군 제2함대 사령부에서 열린 2017년 국군의날 기념식. 국군 의장대와 최신 무기들이 도열해 있다. 국군의날 행사가 해군기지에선 열린 것은 창군 이후 처음이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방부도 국군의 근원이 된 실체를 한국광복군에서 구한말 ‘의병’으로 재평가했다. 대신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첫 공식 군대로 평가했다. 국방부는 올해 2월 ‘대한민국 국군’ 제목의 홍보책자를 발간하고 “강제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가 의병으로, 일제강점기 독립군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발전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됐다”고 기술했다. 국군 모태를 광복군 창설 이전인 의병으로까지 확대 재조명한 것이다.


국방부는 국군의 역사를 1894~1910년(의병전쟁기)에서 시작해 1910~1919년(의병항전 및 독립군 정비기), 1919~1933년(독립전쟁 발전기), 1933~1938년(독립군 개편기), 1938~1945년(광복전쟁기), 1945~1950년(건군기) 등으로 구분했다. 이어 1950~1961년(전쟁 및 전후 정비기), 1961~1972년(국방체제 정립기), 1973~1980년(자주국방 기반 조성기), 1981~1990년(자주국방 강화기), 1991년~현재(국방태세 발전기)로 나누고 있다.


■ ‘아버지’ 없는 육군


해군은 해방병단 창설을 주도한 손원일 초대 참모총장을 ‘해군의 아버지’로 꼽는다. 해군 214급 잠수함이 손원일급 잠수함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이었던 손정도 선생의 장남이다. 공군은 초대 국방차관인 최용덕 장군을 ‘공군의 아버지’로 부른다. 공군사관학교 교가도 작사한 그는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했고, 의열단과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 등을 거쳤다.


육군에는 ‘아버지’로 불리는 창군 원로가 없다. 이범석 초대 국방장관이나 김홍일 장군 같은 광복군 출신들이 있었지만, ‘1~16대 육군참모총장 가운데 12명이 일본군·만주군 출신’인 점이 영향을 끼친 탓이다. 1~16대 육군참모총장 13명 중 최영희 12대 참모총장을 뺀 12명 전원이 일본군(학도병 포함)이나 만주군 출신이다. 육군은 광복군 역사 찾기나 국군의날 변경에 대해 해·공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다. 육군 출신들이 국군의날을 38선 돌파일로 정의하고 싶어 한 것도 6·25 이전 친일 역사를 부정하려는 일본군이나 만주군, 학도병 출신 창군 원로들의 영향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Posted by 경향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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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군사당국이 제70주년 국군의날인 1일 휴전 이후 가보지 않았던 전인미답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공동경비구역(JSA) 주변과 강원 철원 비무장지대(DMZ) 화살머리 고지 일대에서 지뢰 제거 작업을 개시한 것이다. 이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체결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의 주요 내용 실천을 위한 첫 삽이다. 이 군사합의안을 두고 사실상 남북 간 종전선언이라는 평가와 함께 정부가 미국과 충분한 협의나 합의 없이 무리한 양보를 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 가운데 최전방 감시초소(GP) 문제를 우선적으로 분석했다.

 

■ 왜곡 시비 ‘덫’에 걸린 GP 철수

 

남북은 DMZ 평화지대화 방안의 하나로 DMZ 내 군사분계선(MDL)을 중심으로 상호 1㎞ 이내 근접해 있는 GP 11개소를 올해 내로 각각 시범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향후 DMZ 내 모든 GP도 철수키로 했다. 휴전협정 이후 남북 GP 간 우발적 무력충돌은 80여차례 발생했다. 남북한군 사이가 가장 가까운 강원 고성 지역 GP의 거리는 580m에 불과하다. 자칫 오발 사고 하나로도 무력충돌 가능성이 상존해 온 것이다.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에는 비무장지대 내 상호 1㎞ 이내에 근접 설치된 감시초소 11개를 12월 말까지 철수하는 등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을 해소할 수 있는 조치들이 담겨 있다. 사진은 경기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남북한 초소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다. 김창길 기자

 

이를 놓고 보수 야당을 대변하는 한 예비역 장성은 “DMZ 내 우리 군 주둔지를 철수하는 것은 통일이 임박했을 때나 나올 수 있는 계획”이라며 “전시상황에 북한이 1시간 내에 우리 측에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본래 GP와 일반전초(GOP)의 임무는 적 공격 여부를 확인하고 적군 주력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특히 GP는 전투 참가보다 적 공격을 경고하고 철수해 생존을 보장해줘야 한다. 전쟁 상황이라면 GP는 적이 알 수 없는 위치에 설치한다. 상대방이 알 수 없는 곳에서 적의 동태를 확인해야 피해를 입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운영 중인 남측 GP는 정규전에 대비한 군사적 측면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게 군사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그동안 남측은 북한이 계속해서 무장공비를 침투시켰기 때문에 이를 파악하기 용이한 지역에 GP를 설치했다. 북한군 최전방 부대가 무장공비나 간첩 침투보다 탈북자 방지에 더 신경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의 155마일 휴전선 일대 DMZ 작전은 무장공비나 남파간첩 침투 방지에 초점을 맞춰왔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DMZ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했고, 이제는 취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군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북한군은 남측 GP의 정확한 위치를 다 파악하고 있다.

 

야전군사령관 출신인 예비역 대장 ㄱ씨는 “사실 DMZ GP는 과거 북 무장공비와 같은 비정규군의 기습이나 침투를 대비하는 차원으로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사단장인 ㄴ소장은 “첨단 정찰자산 등으로 북한군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GP를 전면전 대비용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적이 이미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DMZ 내 GP와 GOP는 전면전 발발 시 오히려 작전 부담이 큰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아군 GP와 GOP 병력이 북한 포병 사정거리 내에 있는 것은 문제”라며 “전쟁이 발발하면 초기에 막대한 인명 피해가 불가피한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군사전문가인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북한은 전방 GP를 주축으로 경계작전 개념을 수립한 데 반해 남측은 GP 후방의 GOP를 경계작전 주축으로 설정해 놨기 때문에 전방 GP를 철수해도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GP 후방에 다른 경계작전 시설물이 없는 북한군 입장에서는 GP 철수가 매우 불리한 합의라는 것이다. 군은 GP 후방에 155마일 GOP 철책선을 따라 3중 철조망과 무인 폐쇄회로(CC)TV 등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있다. 김 의원은 “북한군은 DMZ 내 생활이 일상화돼 있어 주민들이 농사를 짓기도 하다보니 GP 숫자가 군사적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도 계속 증가했다”며 북한군 GP 숫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DMZ 내 GP 철수의 경우 어느 쪽이 더 손해인지는 자명하다”며 “전방 GP 철수 아이디어도 2005년 한나라당 의원한테서 먼저 나온 것”이라고 전했다.

 

■ DMZ와 유엔사의 이중적 태도

 

DMZ 관할권은 주한 유엔군사령부에 있다. 남북 군사 분야 합의도 유엔군사령관 허가 없이는 DMZ에서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유엔군사령관과 한미연합사령관도 겸하게 되는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 지명자는 지난달 26일 미국 연방의회 상원 청문회에서 DMZ와 관련한 남북한 군사 분야 합의는 유엔사 소관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비무장지대 GP 감축 합의에 대해서도 “유엔군사령부에 의해 중개·판단·관찰·이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미국이 남북 군사 합의에 불만을 갖고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해석이 나왔다. 주한미군사령관이 남북한 교류 과정에서 미국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해 유엔군사령관 이름으로 견제구를 날렸다는 것이다.

 

이를 놓고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 ‘모자’를 또 하나 쓰고 하는 행위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북·미 평화협정이 체결되더라도, 유엔사가 기능을 강화해 한반도 평화유지군으로 거듭나 활동하기 위해서는 제3국 대장이 유엔군사령관직을 맡아야 할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은 전쟁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고, 유엔군사령관은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이중적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군 대장 한 명이 유사시 한반도 전쟁을 준비하면서 남북한군 사이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셈이다. 운동경기에서 선수가 심판을 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연합사 출신인 한 예비역 육군 준장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군사와 관련한 많은 문제들은 전혀 역할이 다른 유엔군과 연합군 사령관이 동일 인물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 GP는 유엔사 관할인가

 

GP가 유엔사 관할인지도 논란거리다. 군에서는 GP를 얼마나 많은 숫자로, 어떤 방향으로 운영하는가 하는 문제는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 영역이라는 입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군은 1994년 연합사로부터 평시작전권을 인수하기 이전부터 DMZ에서 북한 무장공비나 남파간첩에 대한 작전을 단독 수행해왔다. 한국군 합참의장이 대간첩작전본부장을 겸하고 있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GP 운영에 관한 것은 평시작전권 행사와 관련한 내용으로 유엔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게 상당수 현역·예비역 장성들의 목소리다.

 

한 예비역 장군도 “합참은 응당 GP 운영에 관한 것은 평시작전권 행사에 관한 내용이므로 유엔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며 “군이 해야 할 것은 GP 철수로 발생할 수 있는 경계작전의 공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느냐를 고민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GP 철수를 계기로 작전적 측면에서의 GOP, GP 개념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유사시 불필요한 병력 소모와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전면전을 대비한 DMZ 일대 작전의 변화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DMZ 내 군사시설물인 GP는 정전협정 위반사항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전협정상 DMZ에는 무장 시설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유엔사는 정전협정 관리 차원에서라도 남북한군 무장 GP의 철수를 오히려 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 야당과 이를 대변하는 일부 예비역 장군들은 “JSA 비무장화와 DMZ 내 GP 철수는 현재의 유엔군사령부를 ‘핫바지’로 만든 것”이라며 “이는 또 유엔사 해체를 남북이 합의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한국군과 주한미군이 역할을 분담하는 연합방위체계에도 심각한 손상이 초래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Posted by 경향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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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대한민국 군부는 창군 주역 중 많은 인사들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라는 점에서, 나중에는 군사반란(쿠데타) 전력이 있다는 점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 얘기가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왔다. 그러나 해군 장교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결이 다르다. 이들은 독립군 후예라는 자부심을 은근히 과시하곤 한다.

 

해군은 지난달 8·15 광복절에 맞춰 214급 잠수함(1800t급) 9번함 함명을 ‘신돌석함’으로 짓는 행사를 가졌다. 신돌석 장군은 대한제국 당시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무장 항일운동을 펼쳤다. 해군 잠수함의 함명에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많다. 214급 1번함 ‘손원일함’은 손정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의 장남이자 해군 창설자인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이름이다. 2번 정지함은 왜구를 토벌했던 정지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 3번 안중근함, 4번 김좌진함, 5번 윤봉길함, 6번 유관순함, 7번 홍범도함, 8번 이범석함 등은 모두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의 이름을 땄다.

 

육군으로 가보자. 창군 초기 육군 주역들 상당수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로,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 군국주의와 맥이 닿는다. 그 유산이 최근 날조된 것으로 확인된 6·25 전쟁영웅 ‘육탄 5용사’와 ‘육탄 10용사’다. 군의 가짜 영웅 대부분은 일본 군국주의를 모방한 과거 친일파 출신 군부의 작품이다. 일본 군국주의 선동의 도구를 빌려와 호국 영웅의 아이콘으로 포장했던 것이다.

 

공군은 떳떳하게 창군 주역들의 식민지 시대를 밝히고 있다. 공군 창설 멤버 상당수는 일본군 출신들이다. 해방 후 ‘공군 창설 7인 간부’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이근석 대령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의 가미타니 소년항공학교 출신으로 중국 공군기 18기와 영·미 공군기 5기 등 총 23기를 격추한 일본군 에이스였다. 6·25전쟁 초기 시흥 상공에서 전사한 후 공군 최초로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을 추서받았다.

 

원산지구 폭격에서 전사한 신철수 대위, 진남포 상공에서 전사한 나창준 대위, 간성지구에서 숨진 박두원 중위 등은 일본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출신이다. 옥만호 12대 공군참모총장도 일본 육군비행학교 출신이다. 그는 6·25전쟁 당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에 참가했고, 100회 출격을 기록했다.

 

전쟁 기간 중 사망한 총 22명의 조종사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군 출신이었다. 전쟁 후 장군으로 승승장구한 이들도 식민지 시대의 행적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사실이라는 것이다. 공군 후배들도 있는 그대로의 공과를 드러내는 그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육군이 전쟁영웅으로 추앙하는 한 예비역 대장은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을 상대로 한 자신의 행각을 부인해 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창군 육군 원로들도 비슷했다.

 

국군 창군 당시 수뇌부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장악하면서 광복군의 맥을 잇지 못한 한계로 군 역사가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틀어졌다는 지적이 작금에 나오고 있다. 광복군 출신인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은 7개월 만에 해임됐고,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은 착근에 성공했다. 그러다보니 일본 육사 56기생으로 국군 군번 1인 이형근 예비역 대장은 “광복군은 망명군으로서 정식 군대로 보기 힘들다”고 폄하했다.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군에서 득세했다.

 

이제 끊어진 광복군 정신을 잇기 위해서라도 ‘국군의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하자는 의견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상징적으로나마 친일 군부를 청산하고 군의 뿌리를 광복군으로 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때라는 것이다. 앞서 16·17대 국회 때 ‘국군의날 기념일 변경 촉구 결의안’이 발의됐으나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현행 국군의 생일은 1956년 9월21일 대통령령 1173호에 의해 제정된 10월1일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과거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군의날은 창군 이후 각 군별로 창설기념일을 제정하여 시행해 오던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정해졌다. 그런 면에서 1950년 6·25전쟁 당시 육군 제3사단 23연대가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해 정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한 셈이다. 38선 돌파일은 일본군 출신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은폐하려고 동족상잔의 아픔이 담겨 있는 6·25전쟁에 마치 국군의 정통성이 있는 양 호도한 측면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장병들 역시 우리 국군이 항일 독립전쟁의 역사와는 무관한 것처럼 여긴다.

 

국군의 생일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국군의날이 광복군 창설일로 바뀌면 친일 군부 인사들의 일제강점기 행적은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까지는 6·25전쟁 이후 행적만 밝히면 됐다. 일각에서는 국군의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변경하자는 것은 좌파들의 주장이라는 이념적 논쟁까지 제기한다.

 

모든 기념일에는 상징성이라는 힘이 있다. 국군의날 역시 국가의 정체성과 미래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런 면에서 국방개혁 2.0을 통해 군이 환골탈태를 모색해야 하는 현 시점에서 국군의날 변경을 검토할 필요성이 커졌다. 창군 초기에도 그랬듯이 핵심은 육군이다. 육군이 앞장서면 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이는 결자해지 측면도 있다. 분위기도 바뀌었다. 현역 장군들은 일본군 출신들과 다른 세대일뿐더러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은 세대도 아니다. 오히려 현역들은 국군의 정신적 뿌리를 제대로 찾을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예비역 선배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서슴없이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광복군 역사를 국군 역사로 편입시키는 문제를 검토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동안 광복군 역사를 군부가 애써 외면해 왔다는 것에 대한 간접적인 질책으로도 들린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Posted by 경향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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