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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기자수첩

북 인민무력부장과 감귤

북한의 ‘인민무력부장’은 남한의 국방장관 격이다. 오늘의 글은 북 인민무력부장과 관련된 이야기다.

2000년 9월 북한 인민무력부장은 김일철 차수였다. 그는 제주도를 방문했다. 2박3일간 제주에서 열린 남북 첫 국방장관 회담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회담 파트너는 조성태 전 국방장관이었다.

당시 조성태 국방장관과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제주공항에서 숙소 겸 회담장인 제주 서귀포 중문단지 내 호텔 롯데까지 같은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눴다.

5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를 이들은 일부러 제주도 해안도로를 돌며 75분간 여유있는 대화시간을 가졌다.(언론은 이를 파격적인 승용차 밀담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두사람은 시드니올림픽 남북한 공동입장을 화제삼아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로 살아가는 얘기와 제주도의 풍광을 화제에 올리기도 했다.

한가지 비화를 소개하자면 승용차 안에서 김 부장은 제주도의 감귤 농장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아마도 이북에서는 보기 힘든 감귤이 지천으로 깔린 모습이 눈에 크게 들어왔던 것 같다)

그러자 이를 눈치 챈 조 장관이 “요즘 남한에서는 귤이 쓰레기가 됐다”며 “우리 군에서는 감귤 쓰레기까지 처리하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김 부장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이에 조 장관은 “제주지사가 귤을 공짜로 줄테니 군에서 제발 가져가서 처리해 달라고 했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2000년 당시 제주도에서는 예상 외의 귤 풍년이 들었다. 이바람에 귤 가격이 폭락했고, 농장주들은 육지까지 운반하는 운송비도 안나온다는 이유로 귤을 폐기처분하기에 이르렀다)

조 장관은 “해군 LST까지 동원해 귤을 육지로 실어 나르고 있다”며 “그렇게 해서 전군에 귤을 배급하고 있는 데 우리 군이 버린 귤 처리까지 떠맡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 부장은 상당히 놀란 듯 했으나 했으나 이를 애써 내색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 일종의 ‘속상함’으로 보일 수 있는 표정이 스쳐갔다. 그리고 한동안 창밖만 뚫어져라 쳐다봤다.(북에서는 인민이 굶주리는 판국에 남쪽에서는 귀한 귤이 쓰레기 취급받고, 게다가 군대가 이를 병사들 간식으로 마지못해 처리해 준다고 하니 그럴만도 했다)

결국 조 장관은 귤 얘기를 슬쩍 하면서 체제의 우월성과 남쪽의 풍족함을 간접적으로 북의 인민무력부장에게 자랑한 셈이 됐다.

이후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2007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제2차 국방장관 회담에도 참가했다. 이때 그의 상대는 김장수 전 국방장관(현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그때 70대 후반의 고령이었던 그는 김 전 장관에게 자신의 건강관리법으로 하루에 30분씩 탁구를 친다고 소개하기도 했다.(올해 김일철의 나이는 81세다)

김일철은 지금의 인민무력부장인 김영춘 보다는 유연한 편이었다. 해군 출신인 그는 1982년 해군사령관에 임명된 지 10년 만에 대장으로 승진했고, 97년 차수로 진급하면서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에 기용됐다. 김정일 체제가 공식 출범한 98년 9월에는 국방위 부위원장 겸 인민무력부장에 올랐다. 이후 11년 동안 같은 직책을 유지하다 2009년 2월 김영춘에게 인민무력부장을 내주고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으로 강등됐다.

김일철은 지난해 이 자리에서도 해임됐다. 그의 해임을 놓고 북한의 발표대로 고령 때문이란 설도 있고, 김일철 개인의 과오 때문이라는 설, 남북대화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다 그 결과를 놓고 문책을 받았다는 설 등이 엇갈리고 있다.

아뭏든 북한이 지난달 남북고위급군사회담을 제의하면서 제3차 국방장관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군사 대화가 궤도에 오르면 남북대화의 본격 시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남북 군 고위층들이 설사 이견을 보이고 말다툼을 하더라도 만나야지 서로의 의중을 읽을 수 있고 조금이라도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공감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김일철 전 인민무력부장도 제주도에서 귤때문에 맘이 상했을지라도 그 경험이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나름대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런 측면에서 2월 8일 판문점에서 열리는 군사 실무회담부터 첫 단추가 잘 꿰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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